Sola Fide, Scriptura, Gratia : 오직 믿음으로 ( 1:16-17)

 

여러분이 다 아시는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모양내기를 좋아하는 한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이 임금님은 특히 새 옷 입기를 좋아해서, 훌륭한 재단사가 있다고 하면 아무리 비싼 값을 치루고서라도 옷을 해 입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 나라의 유명하다는 재단사 형제가 임금님을 찾아옵니다. 사실 이 형제들은 사기꾼일 뿐, 진짜 옷 짓는 기술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임금님의 사치스런 마음을 잘 이용하면, 쉽게 자기들의 꾀임에 빠져서 옷을 주문할 것을 믿었습니다. 예상대로 신소재 옷을 만들겠다는 말에 넘어가서 임금님은 그 재단사 형제에게 서둘러 옷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신소재 옷감이란 나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투명 옷감이었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이 가봉(假縫)을 하게 되어서 그들이 일하는 방으로 갔을 때, 옷감짜는 기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임금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재단사 형제들은 임금님의 몸에 옷을 걸치는 시늉을 하고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앞다투어 찬사를 쏟아놓습니다. 임금님은 속히 옷을 다 완성하라고 독촉하고 방을 나오지만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 니다. 드디어 며칠 후, 옷이 다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님은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착복식을 합니다. 신하들은 새 옷 입은 임금을 향해 온갖 찬사를 늘어 놓습니다. "왕이시여!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금처럼 빛나는군요!" "최고의 작품입니다!" "누가 뭐래도 왕께서는 지상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십니다!" "왕이시여! 정말 죽입니다!" 

하지만 신하들 역시 임금님처럼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은 그저 옷을 벗은 벌거숭이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백성들에게도 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로 나갑니다. 백성들 역시 미리 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임금님의 모습을 보고는 신하들처럼 말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모를 따라 나온 한 어린 아이가 마구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 임금님은 벌거숭이 임금님이네! 저기 봐! 다 벗었잖아!" 그 얘기를 들은 임금님은 그제서야 자기가 속은 것을 압니다. 아이들은 착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임금님은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이 동화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있는 나쁜 양심이 드러날까 두려워합니다. 또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을 말했을 때의 뒷감당까지는 책임지기 싫어서 침묵합니다. 아울러 대부분의 사람이 옳다고 하면 의심이 가면서도 거기에 편승합니다. '아니오!' 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또한 진실은 아주 순수한 사람으로부터 밝혀지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쓴 안데르센은, 동화라는 수단을 써서 인류에게 "늘 진실하라! 진실을 밝혀라!" 그렇게 경고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 10 31일 카톨릭의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다 95개조의 논제를 붙이고 그것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안함으로서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작심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대학 게시판에 써 붙인 논제들이 그렇게 교황청과 전유럽을 소용돌이에 몰아넣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우리 개신교는 이 종교개혁을 통해 구교, 즉 카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1500년간 지속되어 온 교회가 왜 두 개로 나뉘어졌는지, 그 전 과정 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부족할 뿐더러 그렇게 세세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뿌리의 대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몇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는 복잡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벌거숭이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진실이 있습니다. 그 진실은 시간이 가도 지켜져야 하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진실은 어느 덧 깊이 묻혀지고, 진실 아닌 것이 진실을 둘러싸고 그것이 진 실인 양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몇몇 선구자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진실을 되찾기 위해 싸웁니다. 희생과 고난 끝에 찾은 진실은, 사실은 새로 찾은 진실이 아니라 다만 처음으로 되돌아 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사에서 그 각각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누구이며, 진실 자체는 무엇이며, 진실을 되찾기위해 치뤘던 희생은 어떤 것일까요? 많은 개혁자들 중에 오늘은 마르틴 루터가 목숨걸고 시작했던 개혁의 모토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종교개혁의 첫 번째 모토는, Sola Scriptura 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가 그것을 첫 번째로 내세운 이유는 뭐였을까요? 그만큼 그 시대의 카톨릭은 성경과 멀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우습게도 당시에는, 성경은 아무나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해석은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고 교회법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법은 모든 법의 가장 상위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황이 허락한 성직자들 외에는 아무도 성경을 읽으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성경은,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써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동안 교회가 지켜온 교리나 제도가 성경의 어떤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러분! 왜 당시 성직자들은 이렇게 성경을 일반 백성들과 차단시켰을까요? 성경을 보면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읽어봐도 교회와 교황이 벌거숭이 임금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진실을 감출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놀랍게도 이 문서가 공개된 지 2주 만에 전 독일에 영성회복을 위한 신앙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약 4주만에 이 문서는 전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질 않았는데,  95개조 논제가 퍼져나가자 제일 먼저 타격을 받게 된 것이 면죄부 사업이었습니다. 더 이상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중간에 교황청은 루터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지만 루터는 거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루터는 보름스(Worms)에서 소집되는 국회에 출두 할 것을 통보받습니다. 물론 교황청의 사주를 받은 것이지요. 이때 루터의 친구들이 그곳에 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는 한 달 이상 걸리는 거리이고 암살의 위험이 너무 컸고, 다행히 무사하더라도, 보름스에 가게되면 유죄판결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루터가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 그러고는 죽을지도 모르는 그 길을 담대히 갑니다. 그때 보름스로 떠나면서 그가 불렀다던 찬송이 지금도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찬송가 384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입니다. 

물론 카톨릭에서는 가장 싫어하는 곡이지요. 그가 국회의 청문회에서 심문받은 내용은, 그 동안의 그의 모든 저술과 95개조 논제에 대해 서 철회할 뜻이 없느냐는 거였습니다. 거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청문회를 보려고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 회의 권위를 인정할 뜻이 없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모두 다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보십니다. 루터의 말처럼 나의 양심은 그렇게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내 삶은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마르틴 루터의 후예라면 우리 역시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르틴 루터의 행한 일은 모두가 다 성경에 근거한 시도였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다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종교개혁의 주역이 되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일 이후로 때맞춰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자 성경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라틴어로 된 것이었지만,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까지 해냅니다. 그 동안 일반 성도는 접근도 할 수 없었던 성경이 독일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성경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삶의 뿌리를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황청이 처음으로 면죄부를 판 것은 1096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입니다. 사람들을 전쟁에 나가게 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발행한 것입니다. 그 면죄부는 어떤 신통력이 있냐하면, 면죄부를 가진 사람은 죽어도 지옥으로 가지 않고, 연옥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지금 들으면 말도 않되는 얘기지만 교회법과 전통에 길들여져 있는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면죄부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황청이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게 됐는데, 물론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 성당은 한꺼번에8천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입니다. 짓는데만 100년이 걸렸고,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의 건축가들이 설계하고 감독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교황청은 다시 면죄부를 판 것입니다. "당신의 돈이 헌금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당신의 어머니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뛰어 오를 것입니다." 

여러분! 면죄부는 뭐며 또 연옥은 무엇입니까? 면죄부는 글자 그대로 죄를 용서해주는 종이라는 건데, 누가 지은 죄를 누가 용서합니까? 사람이 지은 죄를, 면죄부가 용서합니까? 또 면죄부를 사려고 헌금통에 땡그랑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 죄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면죄부는 오래 전에 죽은 자기 부모님까지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내진다는 겁니다. 연옥은 카톨릭이 만들어 낸 천국과 지옥의 완충지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주 몹쓸 사람 아닌 다음에는 지옥으로 가지 않고, 연옥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수련을 쌓은 다음, 자격이 되면 천국으로 보내진다는 거예요. 그 연옥생활은 몇 천년이 될 지 모르는데, 면죄부를 사는 순간 부모님은 그냥 천국으로 높이뛰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것, 부모님 것, 할머니 할아버지 것, 돈 없는 내 동생 것, 일찍 죽어서 지금 연옥에서 헤매고 있는 조카 것, 전부 다 사야됩니다.  

그러니 면죄부 판매원으로서는 고객층이 얼마나 넓습니까? 거의 무한대지요. 그래서 루터는95개조 조항을 통해서 그가 주장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구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구원은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종교개혁의 두번 째 모토,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만' 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구원이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에베소서 2:8, 9절에 근거해서 확고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할렐루야

구원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본 것처럼, 그렇게 주어진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이 구원일까요? 구원이란 자유함을 말합니다. 즉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짐을 받는 게 구원입니다. 병들었던 사람은 낫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겐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큰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죄는 속성상 또 다른 죄를 낳게 되고 우리는 그 죄의 가책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됩니다. 이 죄의 문제 역시 우리 인간이 해결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지 다른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면죄부를 산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 유행했던 남몰래 하는 선행으로도 구원은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주시는, 그 십자가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오직 은혜"로서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이런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열광했습니다. 그야말로 성도들은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임금님은 벌거숭이"라는 것을 루터가 대신 말해준 것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바랄 것도 은혜요, 우리에게 가장 큰 힘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선물로 주어진 은혜를 매일 기뻐하면 사십시다. 또한 바로 그것이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심을 깨닫고 그 분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모토,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를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어떤 행위가 필요하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믿음으로 의롭게 된자는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요구하시는 게 아닙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면죄부를 사는 일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십자군으로 전쟁터엘 나가고, 성 베드로 성당엘 가서 노역을 한다해도 거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예술품으로서는 훌륭할 모르지만, 교회사적으로 보면 가장 큰 위선의 상징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분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그 이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단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이 Sola Fide는 중세기의 칠흑같은 어둠을 깨는 한마디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행위가 없었다고 기죽지 마시고 오직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이 세 가지 종교개혁의 구호를 함께 외쳐 보십시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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