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배려와 도피성 (여호수아 20)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이끄시는 목자로도 상징되고 어둠을 비추시는 빛으로도 상징되고 생명의 떡으로도 상징됩니다. 그 가운데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는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존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다 존엄합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고 피를 흘린 사람은 반드시 똑같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6:23). 어떤 죄든지 그 형벌은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육신의 사망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려면 늙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늙어 죽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사망으로만 죗값이 끝나면 그나마 좋겠지만 육신이 죽고 난 후에 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9:27). 죽은 후의 심판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20:13~14). 우리의 죗값은 육신의 사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의로 지은 죄든 과실로 지은 죄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런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도피성 제도는 먼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Ⅱ.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으로 가는 길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여호수아 20 1~6절을 보게 되면 과실치사를 한 사람은 도피성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사고를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의 말을 듣고 도피성에 들여 한 곳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주며 보수하는 자가 와서 그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내어주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 살인자에 대해 자세한 재판을 합니다.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 재판하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과실로 살인했다는 것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보수하는 자가 와서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피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 보수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때는 도피성에서 해방되어 자기 집으로 가도 안전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첫째,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세 개씩 있습니다. 왜 도피성을 동편과 서편으로 흩어놨느냐?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 19:6).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멀면 보수하는 자로부터 죽임을 당할까봐 어느 지파에서도 가깝고 쉽게 갈 수 있도록 흩어놓은 것입니다.

 

둘째, 도피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인도 가고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도 갈 수 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 35:15).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타국인이나 여행객이나 어떤 사람이라도 과실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도피성은 24시간 열려 있었습니다. 닫혀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도피성 문 앞까지 와서 문이 닫혀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넷째, 도피성 안에는 과실치사자가 먹고 살 수 있는 음식들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맞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굶어 죽지 않도록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를 빈틈없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까? 

 

Ⅲ.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나은 도피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좋은 도피성’(better refuge)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피난처에 피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가 있지만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피난처에는 용서가 있고 소망이 있고 안위가 있습니다. 

 

 

왜 땅의 분배를 마치고 이 도피성을 세우는가? 진정한 안식은 땅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땅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사망의 골짜기가 된다. 아무리 험한 땅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으면 안전하다. 참된 피난처는 우리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