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하시는 예수님 ( 4:14-21)

 

 

성령에 능력으로 살자

예수님의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난 후 모습을 누가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4 1절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서 오시는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 신약시대 이후의 신자에게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책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입니다. 두 책을 합쳐서 누가행전이라고도 합니다. 특별히 다른 책과는 구별되게 성령 사역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에 대해 57회나 언급하였습니다. 

 1:35, 41, 67; 2:25-27; 3:16, 22; 4:14, 18; 10:21; 11:13; 12:1-,12에서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에 이끌리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들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역군들일 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8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 of the earth."

신자들이 성령으로 부터 받는 능력은 ‘courage, boldness, confidence, insight, ability, and authority’등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라간다면, 우리의 삶 속에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처음에 ‘성령에 이끌리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기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효과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타이밍과 능력을 기다려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하시는데 있어서 질서있게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부하나님의 권위에 철저히 순종하심니다. 또한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구속함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 역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특별히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질서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경건의 모습

 4:16절을 읽어 보세요. 늘 하시던 대로(as usual)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2:42, 49절은 어린시절부터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더 들어야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매주 예배에 참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규칙적으로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역에 있어서 본질과 영광을 동등하시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구별을 지어서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을 중요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예배가 그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경건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모범을 제시한다. 

 1:35에는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Rather train yourself for godliness.

euvse,beia piety toward God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경건의 훈련을 하셨습니다. 하물려 우리이겠습니까? 경건의 훈련을 가지십시오. 훈련이라는 말은 train,  gumna,zw 입니다. 로마시대 육상선수들이 훈련을 규칙적으로 하듯이 말입니다. 

 2:42,49절에서 주님께서 어린시절부터 경건훈련을 했듯이 신자는 초신자때부터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지 않으면, 기신자되면 참으로 힘듭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심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길을 찾고 있습니까? 왜 만나려고 하십니까?그러나 우리 안에 이 만남, This meeting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아직도 많은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러 붙어 예수님의 임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끼리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도 피라미드 구조를 깨뜨리시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들 서로가 온전한 연합 속에 살아가는 원형 모델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직의 모델이 아니라 말입니다. 

 4:19절의 주의 은혜의 해 달력상 해가 아니라 구원이 선포될 시기, 즉 메시아 시대를 말합니다.  61:1-2부터의 인용은 희년 (25:8-55)을 암시합니다. 50년마다 맞는 희년이 되면 종들이 해방되고, 빚이 취소되며, 조상의 토지가 원래의 가족들에게 되돌려졌습니다. 

이사야는 일차적으로 미래의 바벨론 유수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그 모든 결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은 은혜의 해이지만, 재림 후에는 심판의 날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과 상으로 믿지 않는 자는 영벌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들을 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

흔히 우리는 말씀을, 밖에 나가 삶을 바꾸라는 훈계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온전한 능력은 말씀을 들은 후 삶 속에 적용하는 우리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중에 신령한 역사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말씀 자체의 능력에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말씀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예가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을 찾아가신 기사에 은혜를 받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4:18-19을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을 읽은 후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불현듯 분명해진 사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는 더 이상 회당 밖 어딘가에 있는 자들, 먼 훗날 해방될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듣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듣는 중에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중에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해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듣는 중에 그 경청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의 기본 가치를 실용성에 두는 사회에 사는 이들에게 이것은 당장 사뭇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말의 치유력과 파괴력을 대체로 무의식중에 이미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라고 말할 때,우리는 단순히 유용한 정보를 접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안에 뭔가 작용을 일으킵니다.

내 피가 돌게 하고 심장이 뛰게 하고 호흡이 가빠지게 합니다. 기분과 생각이 달라지게 합니다.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도약하게 하며 나 자신을 더 알게 해 줍니다. 이런 말에는 우리를 치유하거나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로 부터 상처를 입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자유란 어떤 제한이 제거되거나 면제됨, 신체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타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자유는 종들에게주신 것으로 물리적 환경에서 해방, 신약에서는 죄로부터의 자유로 내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실존적이며 그 의미가 깊다. 

죄된 말로부터 자유하라. 상처의 말로부터 자유하라.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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