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하는 삶 : 하나님께 반응 (히 11:1-3)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자 바쳤는데 이를 보고 우리는 쉽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이 생기는가 하는 점입니다. 누가 그런 믿음을 갖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싶은데 그것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선물인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연습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인가는 많은 신앙들의 숙제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어떻게 생기며, 그 믿음은 어떻게 자라가고, 좋은 믿음은 어떤 것이고, 혹은 잘못된 믿음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 보려 합니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을 보면 믿음의 정의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신념과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학에서 믿음이란 인간이 절대자 또는 초월자를 이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믿음은 새로운 지식을 발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다” 곧 믿음 혹은 신앙은 사물에 관한 것이나 사실에 관한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겠습니다. “성경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이 최초의 인격화는 하나님께서 한 인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신약의 선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에 의하면, 신앙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여 믿음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고 인격에 대한 신뢰인데 성경 혹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믿음은 사실에 관한 것보다 인격에 관한 신뢰 쪽입니다. 이 인격에 관한 신뢰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만 만들어지는 관계입니다. 인격과 기계의 사이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계를 놓고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기계가 어디에 쓰이고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를 알고 있지만 고장나서 열심히 빌면 이 기계가 스스로 고칠 줄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계가 고장이 나면 고칩니다. 고장난 것을 고칠 뿐 기계를 설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하여 기대를 하고 설득을 하고 신뢰를 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도, 다른 한 쪽의 조작과 조정에 의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지와 결정에 대하여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도 좋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설명이 제일 잘 되어 있는 곳으로 히브리서 11장을 찾습니다. 히브리서는 곤경에 처한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그 중에서 11장은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는 예수를 믿는 자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고난을 감수할 몫이 있다. 책임이 있다”는 쪽으로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제는 이 큰 영광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책임들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입니다.
여기 구약의 인물들이 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의 책임을 감수했는가 봐라, 저들이 어떻게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을 들고 모든 고난을 감당했는지를 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놓고 객관적으로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삶으로서의 믿음을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강조합니다. 창조했다는 것은 이미 있었던 물건을 가지고 어떤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물론이 아닙니다. ‘물건이 먼저 있었고 후에 하나님이 등장해서 그 물건을 가지고 어떤 것을 만들었다가 아니라 없는 데서 있게 했다(from nothing to something)”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God created from nothing to something)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표현과 함께 이 창조주가 인격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word)이라는 것은 어느 인격에게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자동문은 앞에 무엇이 놓이면 말 그대로 자동으로 열립니다. 인격자가 아니더라도 물건을 앞에 갖다 놓거나 움직이는 물체가 오면 그냥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인격자에게 하는 하나의 의사소통이고 그것을 표현하시는 이도 인격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하나의 법칙이나 힘으로, 인격이 없는 개념, 질서 등으로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성령론을 논할 때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자꾸 놓치고 사물로 보거나 어떤 힘과 원칙으로 삼아서, 성령 하나님을 자꾸 조작해서, 성령의 무슨 은사를 받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갖는 뜻을 일차적으로 놓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우리에게 믿음은 자기가 소원하고 자기가 기대하는 것에 대한 자기 암시입니다. “될 줄로 믿습니다. 되기를 바랍니다. 됐으면 좋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동원하는 것은 자기 한테 체면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습니다. 이 1절 말씀은, 모든 결과를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맞다 하시면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며 내 뜻을 크게 받으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그렇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나중이 될지 몰라도 이 분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 그게 곧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것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의도하시면 그것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은, 믿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며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알게 하므로 그 결과들을 이 분 안에서 다 본다는 것입니다.
엡 1:3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소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지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선포합니다.
구원은 언제 이루어 집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은 날, 내가 예수를 믿기로 한 날에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얘기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은 날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까? 아니면 훗날 내가 개인의 자유 의사로 “나 오늘부터 예수 믿겠습니가”라고 한 날에 얻었습니까? 물론 내가 믿기로 한 날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얘기는 “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하여 죽게 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이 네 인생에 간섭해서 이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이이 때문이란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내기로 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는 거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 보면서 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준비하신 것입니다. 복잡한 얘기입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 없는 예수님의 다른 인도하심으로 완성이 됐을 것입니다. 우리가 타락하는 바람에 십자가를 지셨지만 더 큰 하나님의 계속 속에서는 어느 쪽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의 조상들을 에덴동산에서 샘영 나무를 따먹을까봐 쫓아냈는데 이 생명 나무는 학자들의 모든 견해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를 보내기로 하신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지 못 얻을지, 예수를 영접할지 안 할지 모르는 형편에서 예수님만 보내놓고 마는 분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의지, 계획이 그 예수를 믿도록 우리 인생과 우리 영혼에 간섭하신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어느 시제로 끌고 가느냐 하면 창세 전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창세 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는데 그 계획의 뜻과 목적이 창세 전부터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면,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니 변겨치 아니사니 영원한 분이시니 그 뜻이 바뀔 리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힘이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 모든 결과를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봅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소원에 대한 답과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모든 복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모든 거룩함과 의로움의 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 그의 백성이 된 자는 이미 그 안에서 다 봅니다.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그 분에게서 봅니다. 그 분이 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결과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욥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든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기리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가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믇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니이다”(욥 42:1-6)
처음에 욥은 “하나님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난이 옵니까? 따져 봐야겠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아,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그리고 “네가 내 우박창고를 봤느냐? 네가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는냐?는 이런 이상한 소리만 하십니다. 이에 욥은 “아이고, 하나님, 내가 까무러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욥이 전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질서, 무정한 법칙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욥이 아는 하나님은 인격자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고 죄를 안 지으면 고난 당할리가 없다” 이렇게 밖에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말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정한 법,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의지를 가지고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연과 모든 생명의 인격에 개입하는 하나님이다” 그것을 자연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네 인생에 있어서 나는 심판관이고 무정한 법칙이 아니라 너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네 인격과 네 인생에 개입하는 아버지이고, 인도자이고, 복 주시는 하나님, 전능자이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욥이 항복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네가 그걸 몰랐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 복을 주시며, 그 존재와 인생에 개입하셔서 의와 선과 복과 영광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과 묶이는 것이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호흡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선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며 그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선의 질서 안에서 진정한 인생의 자유를 경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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