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의 결과(히 11:8-10)

 

 

1.    아브라함에 대한 일반적 생각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한 가장 좋은 모델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약간 어려움이 따릅니다.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고 기록함으로써 특별히 앞의 “믿음으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 때에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맡은 자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보면,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는 믿음을 가진 것 같지 않고, 그의 믿음의 그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자란 것으로 보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는 시기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창세기 15장에서입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은 창 12장 사건이고,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하란에 있기 메소포타미아(우리가 익히 들은 갈대아 우르)에 잇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창 15장에 와서 믿음으로 의로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을 왜 창 12장 사건, 아니 그 전에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건부터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브라함을 평가 즉,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았다”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이 일에 아브라함이 반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우선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성경은 언급하는데, 이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반응보다 아브라함을 불러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이 우선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불러 모든 민족의 아비가 되게 했느냐,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했느냐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일을 하셨는가를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 시간, 인생 가운데 어떻게 개입하셔서 일하시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없이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잠깐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은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거나 더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희 조상하고 한 약속과 또 내가 너희를 사랑했기 때문에 부른 것이니라”(신 7:7-8)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반응에만 집중하지 말고, 아브라함을 불러 내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결과 때문이라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강조를 할 때가 많은데, 신앙이 성숙해 지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말하기 보다, 그런 나의 반응이 있게 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일하심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는 것 뒤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인격적인 관계로 나타나는 믿음

이런 이해를 가지고 히 11:8절의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했다”는 것은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함께 역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 다루듯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냥 가도록 프로그램을 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아브라함을 인격적인 대접을 해서 그에게 찾아 오고 그에게 계획을 가지고, 그에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신 행위를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열등한 입장에서 소위 자기보다 높거나 능력이 있는 이에게 잘 보여서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행동이나 열심으로 생각하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믿음에서 믿음으로

창 12장 사건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롬 1:17절이 그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헬라어로 직역하면 “믿음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에는 도대체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롬 3:21을 보면 구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수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1-26) 아멘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복음을,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어떤 분들에게는 상당이 오해 되어 있는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할 때, 제일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문장에서 제일 강조해야 하고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요? 

 

6.    핵심은 예수입니다. 

제일 중요한 단어는 바로 ‘예수’입니다. 믿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기 책임이나 결단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우리가 보통 이야기 할 때, 누구를 향한 신뢰나 그 사람의 편에 서는 정도의 것을 말하지 의미하지 않습니다. 엡 2:8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에베소서가 강조하듯이 구원에 관한 믿음을 설명할 때는 그 믿음이 나의 어떤 신뢰나 결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다”입니다. 믿음은 은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7.    예수안에서 주어진 선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때의 믿음은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닙니다. 인과율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원인을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해서 그 결과를 얻을 때는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예, 내가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한 체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해서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은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선택한 원인에 의해서 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의 결과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나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나의 이것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나, 로마서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것은 ‘인과 율’이 아닌 것입니다. 

 

원인 없이 결과가 생기는 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선물은 내가 돈주고 산 것이 아니라 누가 그냥 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할 때는, 바로 이런 의미를 알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 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할 때 나오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원인으로 삼으시고 그 결과인 구원,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그냥 준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나 선택, 열심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표현에서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초점은 ‘예수’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을 내 선택이나 내 결단으로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것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먼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반응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의지가 먼저 나의 삶 가운데 찾아 온 것입니다. 이 사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서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요. 할렐루야

 

이런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 은혜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옆 사람이 받은 구원과 내가 받은 구원이 차별이 없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베푸시는 이 은혜의, 구원의 내용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자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인정하사 행하신 행위인 것입니다. 이 일은 ‘믿음’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구원에서 쓰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로마서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의 행위가 결국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이셔서, 이 일로 시작을 하시어 우리의 책임 있는 또는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수반하는 믿음을 만들어 내신다”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의 말씀이니다.

 

믿음이란, 상대가 누구인지 알며 상대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경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과 인도함을 몇 십년 동안 경험하면서 창 15장에 드디어 “나,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자신의 의지의 고백을 드린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항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맞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 맞습니다. 내가 인생을 거꾸로 살았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이 헛됨을 인정하고 항복합니다….등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타탕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의 결과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잠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등하게 존귀하게 아주 값있게 대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살 때 물건이 대등한 가치를 지녀야 그 값을 지불합니다. 지불하는 값이 얻으려는 물건보다 턱없이 비싸면 값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물건 + 값 = 물건 값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지불하신 다는 것은 말하자면 옥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이런 차원에서 대등한 가치고 인정하신 다는 뜻입니다. 참 놀라고 놀라운 은혜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주와 피조물을 같은 등가로 놓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대우를 우리의 구원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인격적인 대접입니다.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지를 알고 입술과 삶으로 고백하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닮아가는 고품격의 삶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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