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다스 왕 : 탐심 ( 20:17)

 

여러분의 손이 터치하는 모든 것들이 돈으로 변한다면 어떨까요?

 

1.    미다스 이야기

미다스는 황금을 너무나도 사랑한 프리기아라는 나라의 왕이다. 미다스 왕은 엄청난 부자였지만 더욱 큰 부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왕은 이 노인에게 매일 잔치를 열어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다. 미다스 왕의 환대에 매우 감사한다며 보답으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황금을 너무나 사랑한 미다스 왕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에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손만 대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자 미다스 왕은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다!” 미다스 왕은 날아갈 듯 기쁜 마음에 진수성찬을 차리게 하고 잔치를 열었다. 온갖 진귀한 음식과 맛있는 향기에 미다스 왕은 입맛을 다시며 포도주 잔을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도주 잔은 황금으로 변해 버려 포도주를 마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빵을 집어 들자 빵도 황금으로 변해 버렸고, 고기나 포도, 과일도 미다스 왕의 손이 닿는 족족 모두 황금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 왕을 보며 오렐리아 공주가 슬피 울자 왕은 사랑스런 공주를 위로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바로 그때, 왕의 손길이 닿자마자 공주는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차!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왕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딸도 황금 덩어리가 되고 만 것이다. 미다스 왕은 황금 덩어리가 된 공주를 보며 몹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다스 왕은 할 수 없이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간청했다. 눈물로 간청하는 미다스 왕에게 디오니소스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강가에 가서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 그의 손으로부터 금들이 강을 따라 흘러 가기 시작했고 강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금을 발견하고 함께 행복하고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은행나무 밑에 서 있으면 은행나무가 되고 싶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으면 소나무가 되고 싶고, 감나무에 기대어 서 있으면 감나무가 되고 싶고 이것이 우리 사람의 마음인 가 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    탐내지 말지니라

탐심은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원어로는 더 움켜쥔다는 뜻이다. 어떤 욕망 때문에 움켜 진다는 것입니다. 놓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탐심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시도 때도 없이 발견되는 것이어서, 그저 본능적인 심리 현상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음속에 일어난 탐심은 죄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그 자체로 분명한 죄입니다.  3: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계명과 10계명은 같은 원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근본적인 이유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인 우상들인데요. 이는 다산과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32장을 보면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이 역시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던 애굽 고센 땅의 황소 숭배를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후 그렇게 넘치고 부요한 상태에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지어 주시지 않았을까. 그 이유인즉 옷을 주면 주머니를 달아달라고 할 것이고,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거기에 돈을 가득가득 채워달라고 징징댈 것이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한 음식점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늘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음식을 먹던 중 어느 날 지배인을 불러서 불평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요. 왜 이 음식점은 인색하게 식사 때마다 빵을 하나만 줍니까?” 손님이 불만을 터트리자 지배인은 즉시 종업원에게 빵 4개를 더 가져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하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지배인이 식사를 마친 후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손님, 만족하십니까?” “특별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뭔가 부족한 생각이 드네요. 제가 워낙 빵을 좋아해서요 그 손님은 다음 날 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지배인은 이번에는 빵을 12개를 가져다 드릴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손님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배인도 오기가 생겨서 주방장에서 특별히 초대형 빵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다음 날 손님이 나타나자 지배인은 보란 듯이 준비한 초대형 빵을 손님 탁자에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되겠지 하면서 만족스런 웃음과 칭찬을 기대한 지배인에게 손님은 차디찬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처음에는 많이 준다 싶더니, 다시 한 덩어리 빵으로 개수가 줄어 들었군요

 

3.    모든 계명의 마지막 결론 : 십계명을 주신 이유?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강령입니다.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20-22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 불리우는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12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다시 말하면, 십계명은 옷 갈아 입는 것입니다. 종의 옷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J Fashion(예수 패션)으로 갈아 입는 것입니다. 아직도 옛날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세례로 목욕했으니 옛날 옷을 다시 입으면 안 됩니다.  3:7-10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아직도 옛 날 옷이 좋다고 하면 안됩니다.  3:5 “그러므로 땅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기독교의 교리는 몸이요 윤리는 옷입니다. 요새는 기독교인들이 벗고 다니니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계명을 따라서 살 때 개인 뿐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유지되고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실현될 수 있다는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이 항상 십계명의 단서입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함께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그렇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그렇기 때문에, 00000” 이 단서의 말씀이 없다면 십계명은 일반적인 도덕 규칙일 될 것입니다. 역사의 순간, 구원을 이룬 순간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옛날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에서 정직이라는 것이 많은 목숨을 살리고 보존하는 사랑의 행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계명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삶의 길을 보여 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열 마디 말씀, 계명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겉도는 이유는 내 자아와 나의 삶이 아직 하나님 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에게 두는 어정쩡한 상태가 아니고 "In Christ",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12:15~17절 말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 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꿇어 앉아 영생을 구하던 부자 청년도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자부했지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인 물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18:18-23)

 

그리고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심령을 밭에 비유하면서 재물의 유혹, 곧 탐심을 가시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13:22) 마음 속에 탐심이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탐심이라는 가시에 막혀 결코 결실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읽고 듣고 깨달은 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치 못하는 이유는 바로 탐심에 막혀 그 씨가 자라지 못한 결과입니다.

 

과연 물질은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금 수저니 흙 수저니 해도, 똑똑하니 그렇지 않으니 해도,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느니 안했느니 해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알면서도 무엇 하러 그렇게 악착같이 비난을 감수하며 탐욕을 부리는 것일까요? 

 

가만히 우리 주변을 보면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사람 살이를 어렵게 만드는 진짜 문제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물질만 모으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지배하면서 내가 무엇인가 좋은 삶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살아가는 데는 과연 물질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지난 금요 예배 때, 땅을 더 달라고 하는 요셉 지파의 요구를 보면서 톨스토이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4.    탐심의 복음적 확대

탐심은 근본적으로 성도 개개인의 일평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불신과 원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무엇 하나 걸림이 없고 감사의 고백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무감각한 신자는 자만하여 감사가 메마르고, 평강이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매사에 걱정과 염려 뿐입니다. 모든 탐심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의 소유와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 하여도 다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사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십계명 쉽게 외우기]

 = :절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 :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 :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 :업을 하지 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 :마니(어머니) 아버지 (부모님)을 공경하라.  = :혈포(6발권총을 일컬음)로 살인하지 말라.

 = :보 단장한 여인을 간음하지 말라.          = :로 도적질하지 말라.

 = :차한 변명으로 거짓 증거 하지 말라.       = :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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