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 주님 (엡 4:4-6)
세계명작집 중에 ‘작은 아씨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거기에 딸이 넷 나타나는데 둘째 딸 제인이 왈가닥입니다. 늘 덜렁거려서 사고를 자주 냅니다. 드디어 본인 스스로 좌절합니다. 어느날, 아주 절망에 쌓여 있었을 때 어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온유하고 아주 좋은 분입니다. “엄마, 나 어쩌지? 이래가지고 어떻게 어른이 되겠어요?”“얘야, 나도 너만했을 때 너보다 더 했단다”“아니,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데요? 어머니같이 침착하시고 담대하시고 온유하신 분이 저 같았단말이예요?”“그래 나는 더 했었단다”
그래서 제인이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도 희망이 있구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신자끼리 어떻게 말하나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에 익숙합니다. “저런 사람이 교회에 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그 단계를 거쳐 온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 격려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라는 것이 사실 우리에게는 익숙히 않은 곳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내기에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 주를 모시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해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도 그래서 왔고 나도 그래서 왔다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통일이 없습니다. 같은 편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으로, 그의 자녀로 삼은 귀중한 신분을 얻어 다 동등한 하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빌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자라”
죄는 어떤 면에서 분리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이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교만한 것이라면 이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바로 죄의 성분들이 없어지고, 죄의 결과들이 없어지는 하나님과의 통일이 있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고, 분열과 싸움이 아닌 연합되는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삶이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밀알 공동체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 분 주님을 부르는 공동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성자의 위격의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큰 교리를 “주도 하나이요” (One Lord)라는 단 두 마디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라는 말은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언제나 이 명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후 해변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 사도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시라”, “The Lord”(Ho Kyurios), ‘그 주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21:7) 요한은 특별히 정관사를 붙여서 ‘그 주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주가 아니라 이미 그들이 경험했던 바로 그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죽음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의 주로 부활하신 그 동일하신 주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바로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에 주님과 같은 분이 안계셨으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와 같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님, 곧 나사렛 예수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한 분 주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고 호소하면서 “한 분 주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 분만 기독교 신앙의 대상입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의 집합체도 아니며 단순한 교훈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주님 자신이며 주님과 맺은 우리의 관계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적 관계이며 예수님의 인격을 아는 것이고 이 인격과 관계를 맺게 되어진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께 속하여 주님과 참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이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는 큰 요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망각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주님보다 앞세우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없이 기독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마이클 호튼은 최근에 ‘Christless Christianity’(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책에서 현대 교회가 무엇을 잃어 버리고 있는지를 지적했습니다. 행사도 많고, 프로그램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지만,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실제로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로서 하나입니다. 혈액형이 같아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전공, 나이가 같아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성별이 같아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주를 향한 한 믿음 공동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론적 측면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엡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제적 삶의 측면에서, 예수님을 "구주"(Saviour)로 받아들인 이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산다. 즉,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종(slave or servant)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삶의 목적이 바뀌는 삶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한 세례 = 주님과 연합하여 죽고 살아난 공동체
롬 6:3-6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자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위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애굽과는 단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는 단절이 되었습니다. 애굽의 바로의영향력으로부터는 단절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애굽의 삶을 롬 6:6절에서 ‘우리의 옛 자아’(Hoti Ho Palaioshemonandropos, 여기서도 정관사 the를 통해 그 삶의 방식, 즉 애굽에서 살던 때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엡 4:22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the old man, ton palaionandropon) 벗어버리고”(새번역)‘Palaion: 오래된, 낡은) 정리하면, 애굽에 있던 것은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것이다. 낡은 것이라는 것이다. 골 3:9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the old man)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실제 우리의 삶 가운데 옛 자아를 버리기가 쉽던가요? 참으로 어려운 것이 그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체를 늘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무엇가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귀신이 이끄는 데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바로 그런 삶에서 벗어나서 예수와 함께 옛 삶의 방식과 단절하고, 주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늘 상처 타령하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일전에 한 중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선교를 하시다가, 잠시 미국에 오셔서 어느 교회에서 목회를 돕고 있는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를 담당하고 계시는데, 어느 날은, 집사님 한 분이 찾아와서 성가대를 못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누구 때문에 시험 들어서 못하겠다고요. 그래서 목사님이 한참을 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면 직장도, 친구도 잃게 되고 심하면 감옥에도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런 상처들이 그런 고통들이 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담대히 주님을 믿는 신앙을 고수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참으로 연약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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