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란 존재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 잠언 3:1-10, 4:1-4

 

오늘은 Father’s Day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칼치를 먹을 때 가시를 하나씩 발라 주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추석 때마다 할아버지 산소에 갈 때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저를 업고는 산을 오르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에게도 소중한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른이 되신 여러분, 좋은 아버지십니까? 좋은 아들이십니까? 좋은 어머니십니까? 좋은 딸이십니까? 아버지주일이 주는 느낌은 어머니주일의 느낌과는 사뭇 다릅니다. 어머니주일에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강조하게 되는 데 반해서 아버지주일에는 올바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머니주일에는 어머니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긍정과 감사를 떠올리는 반면 아버지주일에는 아버지가 해야 할 일과 과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제가 아버지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어머니도 마찬가지고요. 좋은 아버지, 어머니로 생각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배는 아버지주일로 드립니다. 저는 아버지 주일을 맞이하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에 주님께서 명시해 주시 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복 받은 자들입니다. 이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사는 가족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아브라함? 그는 아버지와 고향을 등짐으로써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했습니다. 과거와 단절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와 단절하는 것보다는 덜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려 함으로써 자식을 버리려 했습니다. 이것은 미래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된 채 살아가야 할 미래란 아브라함에게는 무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소돔 성을 두고 하나님과 끈질기게 씨름했던 그가 유독 아들 문제만은 이상하리만큼 결단력이 있게 순종합니다.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부자의 간의 대화 내용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까도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까도 아니었으며, 어떻게 하면 성공해서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 까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아왔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삶으로 예배 교육)

 

그리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특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가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공부보다, 돈 버는 것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바른 제사 드리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믿음과 신뢰와 존경과 사랑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누굴 속이려고…)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라면 어떠한 희생이나 죽음도 기쁘게 받아드리려는 각오로 충만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음의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릴 수 있을 가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대화는 두 사람의 삶을 가장 값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어떨까요? 그는 작은 아들 야곱에게 속아서 그를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해준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늙어 눈이 어두워졌다 해도 그렇지, 자기 자식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로서 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그는 야곱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을지 몰라도 에서에게는 야속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과 리브가의 자식에 대한 편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편애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편애는 한쪽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다른 한쪽에 사랑을 쏟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편애는 한편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광신이 지나친 믿음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인 것처럼 말입니다. 편애는 편애에서 제외된 사람만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편애되는 사람 역시 불행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편애를 쏟아 부은 자식이 잘못되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고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분노를 터뜨리는데 사실은 그가 자식을 그렇게 잘못 키웠기 때문에, 곧 잘못 사랑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편애는 사랑의 과잉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은 어땠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아버지란 면에서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좋은 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모세는 민족해방이라는 큰 일로 워낙 공사다망해서 그랬는지 좋거나 나쁘거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분명 자식이 있었지만 성경에 그려져 있는 모세의 모습에서는 아버지의 면모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가야하는 중차대한 직무 때문에 아버지 노릇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옥한흠 목사님도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것을 많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입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가 등장합니다. 사실 그는 자기 자신보다는 딸 때문에 더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가장 먼저 자기를 환영하러 나오는 사람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과연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개선 장군이 되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마중 나왔던 사람은 사랑하는 그의 딸이었습니다. 사정 얘기를 들은 딸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아버지의 서원대로 죽어갔습니다. 이런 입다는 훌륭한 사사였을지는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낙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좋은 아버지의 기준이 그때는 지금과 크게 달랐습니다. 많은 점에서 달랐지만 교육 문제 하나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전문적인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교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훈계하고 가르쳤습니다. 때로는 매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육이 부모의 손을 떠난 지는 이미 오래 됐습니다. 교육은 전문적인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교사들에게 맡겨진 지 오랩니다. 아버지는 그저 돈을 벌어 그런 교육을 뒷바라지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직접 교육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히려 부모는 아버지, 어머니를 막론하고 자식들에게 절절 매다시피 합니다. 자식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느라 바쁜 형편입니다. 옛날에는 좋은 교육을 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였는데 지금 좋은 아버지는 좋은 교육을 받도록 뒷바라지를 잘 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입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기러기 아빠도 감수합니다. 기러기 아빠는 옛날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아버지나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과거와 지금 중 어느 편이 더 좋은 것일까?를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전체가 변했으므로 어떤 하나의 기준만 갖고 현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 부모들도 그랬습니다.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도,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던 입다도 자기 자식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입다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기 때문에 스스로 제물이 되려는 딸을 막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입다도 자기 딸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입다 같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세상이 달라졌고 가치관이 달라졌으며 사람의 성품도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2-3천 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처럼 못합니다. 아마 하나님도 같은 것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법칙도 있습니다. 모범적인 아버지, 부모의 도리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제대로 자식을 사랑하고 내 자식이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희망을 갖고 있다면 우리 자식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서 똑같은 희망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희망이 이루어질 리 없습니다. 내 아이가 겸손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내가 내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가 그 기대의 내용을 내 삶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다면, 우선 내가 먼저 삶의 모든 순간에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질이 우선순위 이면서 자녀에게 믿음으로 살아라 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이면서 자녀들에게 타인을 이롭게 하며 덕을 미치며 살아라 할 수 없습니다. 불평을 하는 삶을 살면서 너희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영역이 다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한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결국 좋은 아버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요 좋은 신앙인이 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 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가치관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게 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덕을 쌓음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영육의 균형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기도와 지식의 한계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인간의 한계와 진정한 소망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겸손과 예배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물질관과 가치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아버지는? 나는 어떤 아버지, 어머니로 기억되기 원하는가? 내가 자녀에게 가르치는 가장 우선순위? 내가 부모에게 배운 가장 우선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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