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에소: 패러다임 시프트 ( 1:16-20)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Thomas Khun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처음으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패러다임' '사례·예제·실례' 등을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언어학에서 빌려온 개념입니다. 즉 으뜸꼴 · 표준꼴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의미 확장하여쿤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하였습니다. 

 

가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갈릴레오 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명확해 보이는 진실조차 거짓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이 하기도 합니다. 패러다임 즉 인식의 전환 관점의 전환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관점을 바꾸는 것은 사물이나 사실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마음의 전환과 같습니다. Stephen Covey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나온 패러다임 전환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조용한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치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란 사람은 아이들이 떠드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아버지는 여전히 무관심합니다. 결국, 참지 못한 한 아주머니가 말을 하고 맙니다. '여보세요, 댁의 아이들이죠? 좀 조용히 시켜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속이 다 후련합니다. 저 악마 같은 꼬마들을 당장에라도 지하철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주머니는 대답을 기다리며 아이들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줄 몰랐네요.' 모르긴 뭘 몰랐다는 거야! 사람들이 속으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아버지가 말을 이어갑니다. '방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아이들 엄마가 죽었습니다. 저도 아이들도 어찌할 줄을 모르겠네요. 소란스럽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조금 전까지 악마 같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비난했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결론은?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념에 의해 사실이 관측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관측이 아니라 감상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습니다. 사실을 보는 게 아니라, 사실을 감상한 자신만의 결론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감상의 기준이 거의 100% 가까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언론과 학교에서, 부모와 사회로부터 보고 들은 얘기가 감상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현실, 즉 갈릴리 해변으로 예수님께서 지나시다가, 어떤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보셨다라는 동사 에이돈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보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에게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어부들에게 찾아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와 주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태어나 몸을 움직여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시작한 고기 잡는 어부의 생활은 그의 인생 바로  그 자체였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제부터 고기를 잡은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하겠다는 말씀은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도 고기 잡고 사는 것이 어때서?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일 잘하고 살면 되지, 예수가 꼭 내 삶에 필요하나? 난 필요없어, 고기 잡고 사는 것이 어때서? 예수님의 부르심의 말씀 속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복된 삶일까요?  

 

주님께서는 이전까지 살아왔던 삶을 뒤 흔드시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을 좇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법과 삶의 목적과 관심에 대해서 완전히 흔들어 놓으시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소명 장면은 늘 이 두 단어가 겹쳐있습니다. 버린다 따른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은 바로 그들의 일상을 지켜주던 도구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다. 나를 있게 하는 모든 삶의 요소들이다) 그들은 매일 그물로 고기를 잡고, 그물을 챙기고, 그물을 고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했던 그물을 그들은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버리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들과 우리는 그물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물을 갖고 있든지 예수님을 따르든지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자기에게만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참된 자유를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의를 버리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삶의 어떤 부분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부분을 버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게 있을 겁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께서 각자에게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그물을 좌로, 우로 던지는 권한이 누구에게 주어져 있습니까? 바로 입니다. 삶의 모든 결정권이 바로 인 것입니다. 그 삶을 우리 모두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한 누가복음을 보면,  5:4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5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주님께서 그물을 내리라고 한 곳은 깊은 곳입니다. 그곳에 가서 그물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지시한 대로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평생에 걸쳐 던져온 그물의 방향을 자신의 판단에 두지 않고, 평생에 바다를 벗 삼아 살아온 그가 그물의 방향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방향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보다, 상식보다, 내가 쌓은 지식보다 더 든든하고 안전한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주를 따르는 것,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무서워서 도망가서 일상의 자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찾아 오셔서 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더라 주님께서 오셔서 처음 그들을 부르셨을 때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던져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라 그리하면 살리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 가버렸습니다. 어떤 자리인가요? 그물을 던지는 결정권의 자리입니다. 그물은 어부의 삶을 있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따르던 주님께 문제가 생기니,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옛 본성, 옛 자아, 구약으로 말하면 애굽의 습성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우리 인간은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산다고 해도 늘 우리는 애굽을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환경에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예수 믿는데 왜 이래? 그럽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믿기 싫어서 힘들었던는데, 믿어봐야 소용없네. 하면서 다시 그 자리로 가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육신을 따라 살아갑니다.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늘 육신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21:5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5:5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얘들과 우리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의 인생의 방향과 결정권을 내가 쥐고 달려가면서, 밤이 새도록 수고하는  아닌가요?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나의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 드려야 산다. 그러므로 그물을 버려두고란 그 그물을 사용하는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그물을 어디에 던져야 하는지, 그 그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결정권을 내려 놓다는 것입니다. 그 그물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왜 그러냐는 질문도 없이 아멘하고 자기의 삶의 현장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멘 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되게 하리라(포이에소, ποιήσω)“내가 만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와 제자들이 실패의 자리에 서도 주님께서는 다시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처음에도 우리에게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가리켜 엡 2:10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포이에마 <- 포이에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되게 하리라 만드신 바라에 쓰인 포이에소 포이에마는 모두 다 포이에오라는 동사가 어근입니다. 즉 이 단어는 그냥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8:30 또 미리 정하신(프로오리센)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에칼레센)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에디카이오센)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에독사센)  동사들이 전부 부정과거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시제의 상태, 과거 미래 현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적 진리를 표현하는 시제입니다. 그리고 그 효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요. 

 

성도의 견인을 말해주고 있다.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말씀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아브라함을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신다)

듀테 오이쏘 무, 카이 포이에소 훼마스 게네스따이 알이에이스 안드로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가치 있는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한 우리들은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치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모두가 우리를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니 아멘으로 화답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됩니다.  1장에서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반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1:7 그대로 되니라, 9, 11, 15, 24, 30절 그리고 3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지으신 (아샤)이 단어가 신약의 포이에소입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아샤, 포이에소)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리 (아샤) 이제 나타날 것이라 / Behold, I am doing a new thing 우리말은 미래 시제처럼 나타나는데, ESV에서 번역을 잘 했습니다. I am doing a new thing 지금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인식의 대전환, 아니 마음의 대전환, U-Turn 하시고 주님을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훌륭한 삶을 원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훌륭한 삶을 그 시대 사회의 통념에 맞추는 삶으로 해석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정북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바늘이 흔들리지 말라야 하는데, 오늘 우리들 중에는 그 흔들림이 자주 있습니다. 나침반이 정북향을 가리키며 가는 것 같지는 근처에 자성을 띄는 물질을 갖다 놓는다면 나침반의 바늘은 요동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내면의 나침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 보기 원합니다. 사회적 패러다임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의 폐해는 타인의 각본을 내 것으로 만든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나침반 바늘이 무엇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버리고 따르십시오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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