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들려온 한 음성 ( 1:9-11)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

세례를 언제 받으셨나요? 세례를 받을 때 기억이 있으신지요?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 죄를 버릴 결심을 표명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가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시작으로 하여, 우리의 세례가 가지는 의미 그리고 그 중요성을 확인하려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세례 기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의의를 살펴보고 설교를 마무리 하려 합니다. 

 

먼저 어떤 의미에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과 그 안에 있는 요한의 세례의 역할에 완전히 동의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종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즉 인간들의 유전과 죄인의 상태를 담당하셨으며, 세례는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 즉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심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으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실 것을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세례를 통해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 속에 잠겼다가 물 위로 솟구치는 과정은 다가올 그분의 죽음과 장사 및 부활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단강에 들어 갔다가 다시 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예표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신적인 위치가 바꿔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이 성경의 예언대로 육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는 메시야일 뿐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처럼 고난 받는 주의 종으로서 메시야적 사명을 선포하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5 이하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데,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 섬김이 본질이 무엇일까요?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 섬김을 믿는 우리가 다 받은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섬김과 사랑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라고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2:11절을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Kurios)라고 고백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라는 표현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고백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의 하나님께 속한 양이라는 고백입니다.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세요. “주님, 나는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우리의 세례의 의미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세례는 어떤 의미와 중요성이 있으며,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례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제정하신 두 의식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19-20). 이 지침들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를 삼으며,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세례를 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곳(“모든 나라들”)에서 세상 끝날까지 수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별 다른 이유가 없는 한, 세례는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또한 세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 및 제자 됨을 공표하는 수단입니다. 세례의 물을 받으며 그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제 영혼을 죄로부터 씻겨 주셨고, 지금 저는 거룩한 새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이런 중요성과 더불어 세례는 신자의 삶에 나타난 내면의 변화를 외적으로 증거하는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자체가 구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될 지라도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필요 조건은 아닙니다. 세례는 행위임으로 '믿음의 의'를 마치 행위의 의로 사죄 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례의 행위로 죄 씻음 받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성령의 역사로 믿고 회개한 선한 양심이 세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 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례는 각 개인이 회개한 선한 양심으로 주님을 향한 순종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죄인 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제자의 삶을 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결단인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사건의 순서를 보여줍니다. 1) 어떤 사람이 주 예수님을 믿는다. 2) 그는 세례를 받는다. 이 순서는 행 2:41절에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더라”( 16:14-15).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믿는 새 신자는 가능한 빨리 세례를 받기를 원하여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8: 35-36)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장 수레를 멈추고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주님께서 명하신 말씀이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공적으로 의지적 결단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들의 선한 양심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선한 의지인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신앙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보면서 그 날 예수님에게 하신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우리 자체로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보십니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때로는 이것이 믿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매우 소중한 자녀다. 나는 너로 인해 기쁘다 이 문장에 자기 이름을 넣어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날마다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어떻게, 어디에서 우리가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속에 그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죄도 없으신 분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죄인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경험을 통해 우리가 죄인 중에 죄인이라는 것을 척 보면 압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더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작년보다, 거룩한 존재로 되어 가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연합하여,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때문에 누리는 은혜요, 복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좋은 것이 무엇이냐면…….? 세례 요한이 외치는 소리가 복된 소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 성경을 연상시키는 엄숙한 언어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그 일을 이렇게 일어났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여왔다고 합니다.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이 열린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저 멀리 하늘에 작은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일상의 실재 이면에 있는 다른 세계, 즉 하나님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우리의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 이 세계보다는 그 세계에 관심과 소망을 두게 됩니다. 

 

이 다른 실재, 그 세계가 우리 눈에 당장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씩, 결정적인 순간이나 절정적인 순간에, 커튼이 열리고 우리는 정말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삽니다.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것 즉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먼저고, 이해가 나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믿고 홍해를 건너고, 나중에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먼저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상상해 보십시오. 홍해 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물이 갈라진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하고 건너려고 하면 바로의 군대에게 다 죽습니다. “물을 항아리에 채워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갖다 주라 하시매와 갖다 주었더니 사이에, ‘kai’(and)이라는 접속사가 쓰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나서 나중에 돌아와서 물을 떠다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믿고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연회장의 반응을 보고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반드시 이와 동일한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람관계, 물질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성경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고 접근하려고 하면 바로의 군사에게 죽습니다. 잔치가 포도주 없이 다 끝납니다.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Too Late to experience the goodness of God”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젊은 사자(자신의 힘을 믿는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떤 자가 여호와를 찾습니까? 젋은 사자이던가요? 주를 찾으시고, 주께 피하는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의 기록 방식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분이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의 삶을 보면서, 그것을 하늘의 비전으로, 하늘의 음성을 듣고 보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들렸던 그 음성이 우리 자신을 향하여 여전히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이 땅의 소리만 듣고 살지 말고,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가려져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하늘의 영역을 바라보는 삶의 전향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 말씀 기억하면서 한주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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