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길위로 ( 10:46-52)

 

2015년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참으로 공사다망한 한해였던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인생론 서론을 보게 되면, 물방앗간을 생활의 유일한 수단으로 하고 있는 어떤 사나이가 나옵니다. 이 사나이는 가루 방앗간의 아들이며 손자이므로 가루를 빻는 데 제분기의 각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나이는 기계학 따위는 조금도 모르나, 가루를 훌륭하게 잘 빻도록 제분기의 각 부분을 썩 잘 다루어서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이 사나이가 제분기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고, 기계학에 관해서 막연한 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빙빙 돌아가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밀을 넣은 깔대기에서 절구통으로, 절구통에서 축()으로, 축에서 바퀴로, 바퀴에서 둑으로, 물로, 관찰을 진전시킨 결과 마침내 모든 것이 둑과 시내()에 있음을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의 돌아가는 힘의 근원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성적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3장의 족보를 보면 우리는 역사가요 의사인 누가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다. ( 3:23-38, 사람들이 아는대로..38,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라. 즉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 사나이는 이 발전을 매우 기뻐하면서, 그로부터는 이전처럼 빻아 나오는 가루의 성질을 비교 연구해서 절구를 오르내리거나, 절구통을 닦거나, 피대(皮帶)를 조이거나 늦추거나 하는 대신 시내의 연구에 손을 댔다. 그런데 그의 물방아는 아주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본문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의(물론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입성이 임박하였음을 암시하여 독자들에게 긴박감과 현장감을 전해 준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변서 삶을 이어 갔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도 지저귀는 새들도 볼 수 없었고( 1 1:7),그에게는모든 것이 공백이며 어둠이었다. 

따라서 그는주위에서 들리는소리에 의해서 혹은직접 만져 보고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만 했다. 그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쪽에서 약 24km 떨어진 위치에 있는 유명한 성읍이었다. 그곳은 종려나무로 유명했으며,헤롯에 의해 아름답게 건축되었으나 후에 멸망했으며 아켈라오(Achelaus)에 의해 재건되었다. 바디매오가 살던 시기에 여라고는 번창했으며 향 기로운 성읍 으로 불릴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바디매오가 예수를 만났던 무렵은 봄이였기 때문 에 여리고는 더욱 청명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볼 수 없는 소경인 바디매오에게는 늘 밤이었고 공허 한흑암일뿐이었다.

1.    왜 바디매오가 부르짓는 것을 꾸짖었을까? 

아마 적선이나 바라는 줄로 알고 꾸짖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절은 많은 사람들이 합세하여 그를 꾸짖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바디매오가 지체시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속히 가시기 위해 여리고에서 지체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무리들의 행위는 주님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질문에서 이미 우리가 그들의 속마음을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관심사는 온통 어서 예루살렘에 가 새로운 메시야 정보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데 있었습니다. ( 9:33-37,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이 잠잠하니..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à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 길위에 있는 것 같으나, 실제는 길 가에 있는 자들의 모습을 모인 것이다. 길 가에 앉아 있는 바디매오와 비교해 보라. 바디매오는 길가에서 길위로 올아오지 않는가! 실제적인 주님을 따르는 속마음의 상태가 내가 길위인지, 길 가인지를 결정한다.) ( 10:35-45,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을 위해서 주님을 지체시키려 한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함께 길 위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2.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50절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경 바대매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ㅅ브니다. 그는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달려왔습니다. 겉옷은 일교차가 큰 팔레스타인에서는 밤에 이불의 역할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는 생활 필수품이었으며, 특히 거지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겉옷이 없으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밤에 치명적인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웃의 겉옷을 저당잡을 경우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2:26) 그런데 본문의 바디매오는 이 겉옷, 특별히 자신의 거지 신분을 상징하는 누더기 겉옷을 내어 버리고 주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주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리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옛 사람을 상징하는 누더기 겉옷을 던져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그 옛 사람의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렴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3.    성도는 자신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36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다, 다시 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로 볼 때 소경 바디매오가 날 때부터 전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원래는 볼 수 있었으나 후천적인 어떤 이유로 시력을 잃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예수께 자신의 잃었던 시력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것이 소경의 제일 큰 관심사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뜬 바디매오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속옷  바람의 누추한 거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의 경험을 비추어 무엇이 보이던가요? 바로 죄인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추하고 더려워서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을 영접했더니 이웃 사람들의 더러운 많이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먼저 눈에 띄여야 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인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적 실체를 모르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아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 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성도 여러분, 영안이 뜨인 성도는 주의 은혜 안에서 먼저 자기 자신의 실상을 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실상을 아십니까? 2015년 어떻게 신앙생활하셨습니까? 성도의 교제는 어떠셨습니까? 예배 생활은 어떠셨습니까? 기도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주님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보셨습니까? 아직도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 성도가 있다면 이 시간 성령님께 죙니된 자기의 모습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4.    신앙의 눈을 뜬 후의 자세가 중요하다. 

52절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 눈을 뜬 바디매오의 반응이 나옵니다. 여러분, 주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무엇이라고 명하셨습니까? 가라입니다. 네 가고 싶은 곳으로 이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집으로 갔습니까? 친척을 찾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눈을 뜨는 즉시로 주님을 좇았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그런 바디매오의 자태의 변화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46절에 길가에에서 52절의 길에서 즉 주님의 가시는 길위로 올라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다 죄로 인해 영혼의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 또한 바디매오와 다를 것이 없스니다. 우리는 비록 육의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소경이 되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우리의 실상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이후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눈으로 세상의 정욕적인 것들을 보고 좇으라고 눈 뜨게 해 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보고 온전히 섬기라고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런 주님의 뜻대로 주를 좇아 섬겼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뜬 후 어떤 것을 좇습니까?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에서 매우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제자들마저 주님의 가시는 길을 모르고 자리 다툼에 연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실체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소경 바디매오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보기 원합니다. 육신은 소경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영혼이 밝아져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경험하고 삶을 결단하는 바디매오의 자리가 오늘 2015년을 마무리 하고 새해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모두 우리 속에 내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정직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이 시간 무엇을 좇으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벌거벗은, 죄악투성인 나 아닌가요? 길 가에서 구걸학, 길 가에서 구경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길 위로 올라와서 주님을 따르라고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길가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던 바디매오, 그는 치유되면서 부터 예수님을 길에서 좇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바디매오는 어떤 곳에도 갈 수 없었던 절망적인 사람에서 이제는 제자의 길을 출발하는 회복된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제는 길가에서 길위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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