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코니아 ( 1:29-34)

 

우리 교회에도 로마 가톨릭 출신이 있습니다. 한 번은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대화를 나눌 때 가톨릭 신자가 물었습니다. 우리 신부님들은 독신으로 사는데, 개신교 목회자들은 왜 결혼을 합니까? 바울처럼 독신으로 살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베드로 사도를 초대 교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말에 가톨릭 신자는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베드로가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부르실 때 그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대부분도 결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희귀한 독신 사역자였던 바울이 그 점에 대해 증언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고전 9:5)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혼도 안 하고 열심히 사역하는데 자기에 대해 자꾸 뭐라고 하고 잘 인정을 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항변하는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다른 사도들,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던 사도들과, 또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동생들, 특히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유다, 그리고 게바 즉 베드로도 다 결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말을 통해서 보면, 그들은 요즘 사역자들처럼 자신의 아내와 함께 다니며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소위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 같은 경우는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을 비롯하여 다른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그의 장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29-30)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 가운데 가장 초기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약간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시몬의 집에서 그의 장모가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집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29)이라고 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베드로의 집이라고 하고, 누가복음 4장에서는 시몬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베드로가 장모님 집에 얹혀 살며 처가살이를 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어려운 형편에 있던 자신의 장모님을 자기와 동생이 살던 집에 모시고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시몬과 안드레는 부모님이 진작 돌아가셨고, 베드로의 장모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과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을 실행한,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모를 모셔와 같이 산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성격은 아주 급했지만, 동생은 물론 장모님까지 모시고 함께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람을 겉만 보고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고깃배에서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7-18)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증명할 길은 없지만, 우리가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면, 이 사건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며 자신과 가정을 잘 돌보던 성실한 사위 시몬이 아무 대책도 없이 갑자기 그물을 확 버리고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간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게다가 사돈총각인 안드레까지 그물을 버리고 같이 갔다는 것은 베드로의 장모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앞으로 난 뭘 먹고 살아야 하느냐? 하는 위기의식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물고기를 잡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안드레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아버지 세베대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두었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는 굉장히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나와 내 딸은 무엇을 먹고 살라고 저렇게 대책 없이 그만두나?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장모는 사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밖으로 불러낸 예수라는 사람에게 화가 났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노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서운함, 섭섭함, 원망, 불평과 같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사역 초기였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라는 분이 누구인지 잘 몰랐던 베드로의 장모는, 비록 풍요롭진 않았어도 행복하고 화목하게 잘 살고 있던 자기 가정에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기와 딸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인생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들 모습 아닙니까?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상황입니다. 

 

몇 년 전부터 세계 의학사전에 한국말로 등록된 병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Hwa-byung. 화병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은 일종의 화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28)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다가 배가 파선하여 몰타 섬에 오르게 됩니다. 거기서 보블리오라는 사람의 부친도 열병에 걸렸는데 이질에 의한 열병이라고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그 병은 바이러스에 의한 열병이었을 것이고, 오늘 본문의 열병은 그것보다는 마음의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수많은 병들이 마음의 병 때문에 생깁니다. 일단 요즘 제일 큰 게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분노가 일어나고 슬픔과 염려가 생깁니다. 이게 지나치게 되면 면역성이 약해진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의학백과사전에서 말하는 화병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참는 데서 오는 증세로, 주로 여성들에게 발병하는 질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화병이 더 많다는 겁니다. 이 병에 걸리면 특히 열이 치밀어 오르는 증상을 보이는데, 화병이라는 말처럼 속에 불을 품은 것처럼 속이 뜨거운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Puresso(be sick with fever), Pura(fire)이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를 그대로 살리면, 속에서 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도 우리 여성분들 중에 화병, 즉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원인이 여러 가지이겠지만, 00이 속을 썩이고 00이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고, 이러다 보니까 화병이 되는 겁니다. 원인이 별로 없는데 열도 나고 몸도 아프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화는 풀어야 합니다. 화는 푸레쏘, 풀었쏘입니다. 화는 풀어야 합니다. 옆사람과 인사해 볼까요? 화 풀었쏘?

 

성경은 그러한 베드로 장모의 상태를 가리켜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30). 열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와 함께 자기 장모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마음이 딱 닫힌 베드로의 장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듣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내 베드로는 장모님께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해드리려고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장모는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30).

 

지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그 일을 위해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눈에, 먹고사는 이 세상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자기 사위 데려갔다고 원망, 서운함, 섭섭함 등으로 병들어 누워 있는 그 모습은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진짜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짜 화를 내야 할 상황이 무엇인지를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새로운 세상을 본 제자들의 삶과 그렇게 살아간다고, 너무 멀리 갔다고 화병으로 누워있는 베드로 장모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1)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신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손을 통해 치유를 받고 병석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 점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 모두 베드로의 장모가 병이 나은 다음에 뭘 했는지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뭘 했습니까? 수종 들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베드로 장모의 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종 들다라는 뜻의 헬라어가 디아코네오인데, 종처럼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망과 섭섭함과 미움의 분노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이제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예수에게 수종 드니라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장모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가 마치 종인 것처럼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위 베드로도 안드레도 섬겼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니까 치유를 받고, 다른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회복이 제일 중요하다. 영적으로 힘들면 만사가 힘들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하실 때 예수님과 치유 받은 사람 사이에 항상 인격적 관계가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니까, 예수님의 손길이 임하니까, 몸의 치유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도 일어나고,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그러고 나니까 이웃과의 깨어졌던 관계도 회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섬김과 봉사는 교회의 본질이다.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베드로 장모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섬김과 봉사는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병에서 치유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서로 섬기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섬길 수 있을 때 섬기는 것이 좋습니다. 훗날 반드시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우들 간에도 서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래도 거두리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하시는 구원의 사역은 잃어버린 디아코니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제일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이 부분을 잘 못합니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오는 이유이든, 영적인 갈등에서 오는 이유이든 이 부분이 제일 힘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선입니다. 그 반대가 악이고요. 선악과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섬기는 것이 이기 때문에, 순종하면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 반대는 이기 때문에 사망인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사명을 다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는 말이 무엇입니까?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점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복된 것이 무엇입니까? , 디아코니아, 섬김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를 아바드라고 합니다. 아바드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Service, 섬김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을 많이 말합니다. 복의 근원이 누구입니까? 보통 아브라함이라고 말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까? 도대체 무슨 복을 받았기에 그가 복의 근원이 되었나요? ? 자녀? 물질? 아닙니다. 그가 받은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디아코니아가 회복된 사람은 사람과 교회를 향한 디아코니아도 회복됩니다. 디아코니아에서 나온 단어가, 여러분의 직분인 바로 deacon, 집사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마음의 열병을 앓고 계십니까? 누워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영적인 열병이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자꾸 원망스럽고, 서운하고, 섭섭하고, 밉고, 눈에 보이면 불편하고, 보기도 싫고, 회피하고 싶고..., 혹시 이런 증상이 있으십니까? 해결책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을 찾는데요.  146:3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거기에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지금 나의 삶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증상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 그분과 기도와 말씀으로 대화를 해보십시오. 분명 그 열병이 떠나고, 일어나서 주님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수종을 들게 되는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복음,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바로 그 일에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거서, 나 자신이 그런 상태는 아닌데, 혹시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자꾸 화가 나고, 섭섭하고, 서운하고, 밉고, 불편하고 그런 감정을 갖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성경이 이것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30).  사람들 속에는 물론 베드로와 안드레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 형편을 예수님께 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정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이처럼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그럴 때, 아픈 사람이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에게 주님이 오시도록 하는 길,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지금 내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 특히 마음이 괴롭고 불편해 하는 사람을 위해, 주님께 그 사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님, 지금 저 형제님(자매님) 000한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저분을 낫게 해주세요.

 

이건 우리 다 할 수 있겠지요? 옆에 괴로워하는 형제자매가 있는데 내 일이 아니니까 난 모르겠다. 난 내 일이 바빠서...라고 하는 게 아니라, 또 그저 내 가족만 위하는 것도 아니라, 그 안타까운 상태를 보며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저분에게 오셔서 치유해 주십시오. 아픈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 저분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를 위해 이렇게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서로 한다면 얼마나 힘니 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건강하고 은혜로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람을 만나보면, 보통 몇 가지로 구분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어디일까요? 

1) VIP : Very Important People                   2) VNP : Very Nice People 

3) VTP: Very Trainable/ed People                4) VDP : Very Draining/Dangerous People 

5) VRP : Very Resourceful People   --> 고전 8:3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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