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없는 신앙 [눅 7:1-10)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가르치시고 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본문에는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몇이 주님께 찾아와서 자기네가 잘 알고 있는 어떤 백부장이 주님께 청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부장[1]의 종이 병일 들어 백부장으로서는 종의 병을 고쳐 주려고 여러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보았지만 병이 낫지를 않아 주님께 그 병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니 고쳐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백부장
- 가버나움에 근무했던 백부장: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다.
- 예수님의 처형을 맡았던 백부장: 이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욕하였던 대제사장들과 구경꾼들 (막 15:29-32)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 본 그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 27:54, 막 15:39)라고 했다.
- 베드로가 만난 백부장, 고넬료: 복음을 듣고 반응을 보였던 첫 이방인도 고넬료라는 백부장이다.(행 10장). 사도행전은 그를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그의 가정에 대해서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집’으로 묘사했다. (행 10:2)
행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환상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합니다. 그때 그의 즉각적인 응답은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였다. 바로 ‘주’라고 부르고 있다. 평소의 경건이 그로 하여금 영적인 일에 민감하게 만든 것이다.
행 10:4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고넬료의 삶을 보라. 그의 삶을 표현하는 문장 중 ‘항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라. ‘항상’ 했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그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오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지만, 당신이 부리시는 천사와 당신의 종, 베르로를 그 가정에 파견하시지 않는가?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은혜,상황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항상’ 주님 앞에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상황과 관계없이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 참석하고, 주일, 수요, 새벽, 중보기도 참여하며 경건의 삶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때를 모르지만,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랬지 않은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는 10년 뒤에 다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다 응답의 시점이 다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여백을 가지지 마세요.
- 바울이 만난 백부장, 율리오: 이 사람은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하였던 사람입니다. 배가 거의 파선 지경에 있을 때, 율리오는 그의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는 것을 막아서 바울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행 27:43)
- 그 밖의 다른 백부장: 그 밖에 바울이 로마 사민권자임을 천부장에게 전한 백부장 (행 22:25-26), 바울의 살해 음모를 알고 있는 바울의 생질을 천부장에게 인도한 백부장 (행 23:17)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 예수님을 누구로 아는가?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병이라는 흑암의 세력도 물러가게 할 수 있는 권능과 권위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여” (눅 7:6)라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사실을 백부장이 바로 인정한다는 것과 또한 그 바른 인식하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경외와 공경을 마땅히 드리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백부장의 바른 인정과 공경과 두려움을 알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기 위해서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눅 7:7)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란 인물의 그 위엄뿐 아니라 자비도 믿었습니다. 또 예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것을 바로 돌리지 않느면 안 된다는 것도 믿은 것입니다. 마땅히 돌려야 할 것은 공경과 두려워함입니다.
예수님께 대해 마땅히 돌려야 할 공경심으로 “그는 너무 숭고하신 분이라 내 집에 오실 수가 없고 내가 감히 그 앞에 나갈 수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현주소였습니다.
사람의 신앙이 참으로 높이 올라가려면 이런 위치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런 위치에 도달해서, 먼저 예수님께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이 첫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중요한 지식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되 시시비비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들, 예수님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 그저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되 마땅히 바로 알고 드려야 할 바른 인정을 예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 편이었습니다.
바른 인정을 예수님께 돌리지 아니하면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로부터 받을 바 구원을 바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의 구원을 받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성공한 윤리가, 사회운동가로 아는 지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통적인 서기관들 혹은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있고, 또 당시의 정치 형세하에 가기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전통적인 시사가 있는 까닭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도덕적으로 고도한 메시야 왕국만을 자꾸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문제, 기본적인 죄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쫓아다녔지만 그 아는 것이 모두 다 제각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리 추구의 종교로 만들지 말라
어떤 사람은 눅 12:13-15절에 보면,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는 예수님의 그 점잖으심과 위신과 인기를 이용해서 자기 형제간의 재산 싸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정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요구가 외면적으로는 상당히 비천한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의 요구는 어떻습니까? 형식만 다를 뿐 결국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자기의 실리를 찾으려 한다는 내용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실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란 말하자면 결국 종교/예수님/교회가 자기에게 어떤 실리를 갖다 주느냐에 따라서 열을 내기도하고 거기에 착심하여 나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알되 ‘예수님이 누구였든지 그런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가 누구였든지 이제는 그의 위신이나 그의 어떤 신비한 힘을 이용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내 불행을 메우고 내 행복을 증진시키면 그만 아닌가?’ 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해서 더 간절히 아는 일이나 어떤 것이 자기들이 취할 신앙의 모습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기어코 나의 실리적인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소원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실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간곡하게 나와서 병을 고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병이 낫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지 저 사람이 얼마만한 성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의 기도를 받아 가지고 병이 낫는 실리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론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논외로 하고, ‘병이 낫는다고 하니까 밑져야 본전이다. 한번 가본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많은 유치한 사람들이 흔히 빠져 들어가기 쉬운 모습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분들이 대부분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런 실리의 동기가 먼저 있어서 거기에 밀려서 뒤좇아 다녔습니다. 물론 그런 실리의 동기로 좇아다니다 보면 점점 실리보다도, 혹은 실리와 동시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리를 예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요 4:48 “너희들은 이런 기적이나 이사를 보지 않고는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다시 말하면, “기적적인 어떤 실리가 너희 눈앞에 나타나야만 그걸 믿는 사람들이 너희가 아니냐?”라고 정곡을 치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9:57-58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도다.” 고 하시면서 좀 제대로 알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고 오게 합소서”하는 제자에게 “죽은 사람들의 고별식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서 하도록 하고 너는 나를 좇아 복음을 전하라” (눅 9:59-62) 다시 말해, 그렇게 뒤섞어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또 “살아 있는 식구들한테 작별하고 오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때에도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잡다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 대한 인식이 나쁜 쪽으로 들어가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일까지 생겨나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요 8:59, 10:31), 또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서 임금을 삼으려고도 했습니다. (요 6:15)
요 6:15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홀로 산으로 올가 떠나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홀로 가시는 모습…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놓고 예수님의 그 특별한 인망이나, 인기, 그의 크고 신비한 권능, 가르침, 그의 자태, 가치를 놓고 앉아서 모두 자기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해석하고 생각하고 나갔을 뿐, 예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방인이 말입니다. 어떻게 이방 사람에게서 이런 것이 나왔을까요? 저는 바라건데 저와 여러분에게 백부장과 같은 신앙고백이 오늘 주님께 올려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을 듣고 우리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는지 그 기분을 상상해 보세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극찬을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이처럼 기뻐하셨을까요? 그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8절입니다.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왜 이렇게 합니까? 바로 상명하복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서 그 관계의 질서를 알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어떻게 인정하는 것입니까? 질병과 예수님과의 관계, 세상사와 예수님과의 관계, 우주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삼라만상의 주인이 바로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다도, 바람도, 빵도, 돌도, 질병도, 고난도 예수님의 명령 앞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이 신앙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응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문제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누가 주인입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러면 그분께 다 맡겨 드려야죠. 내가 고민하면 않돼죠. 주인이 내가 아니잫아요. 예수님을 인정해 드리세요.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1]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또한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들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 강해 설교 > 누가복음 Luk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 성전이 여기 있는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0) | 2024.10.13 |
---|---|
실망과 소망의 기로 [눅 24:32] (0) | 2024.10.13 |
생명이란 무엇인가 [눅 12:13-21] (0) | 2024.10.13 |
인생의 두 갈래 길 : 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0) | 2024.10.13 |
베드로는 왜 갑자기 '죄인'이라고 고백하는가 [눅 5:1-11] (0) | 2024.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