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사데교회 (계 3:1-6)
혹시 다음의 시를 들어 보셨는지요?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이 시는 ‘모든 허위와 가식은 사라지고 오롯이 ‘알맹이’로 형상화한 순수만이 남기를 바라는 심정’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데 교회에 보내신 편지를 통해 우리의 삶에 주님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계시는지 살펴 보기 원합니다. 1절 전반부에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주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사데교회의 형편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을 묘사하는 것과 그들의 처한 상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데 교회에 등장하신 주님은 ‘7’(완전수)이라는 수로 표현됩니다. 이는 성령의 완전성을 보여주면 겉모양만 화려한 사대 교회를 완전(일곱 영, 일곱 별)하게 통찰하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절 후반부에 주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I know your deeds’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행위가 복수(plural)입니다.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데 교회더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 내에는 우리가 몇 주간 살펴 보았던 교회들처럼 이단들도 없었고, 도시로부터 핍박도 없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죽었다고 하십니다. 행위가 풍성했는데 죽은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를 겉만 번지르르한 죽은 행위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 23:27-28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배당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화려한 행위들을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집작하고 중독되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런 삶, 그렇게 죽은 행위를 하고 있는 사데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Wake up)는 ‘잠에서 깨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모양만 풍성한 죽은 행위들을 하다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에 근거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닌 형식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네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으로 사데교회에게 처방을 주십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그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행위가 되게 하기 위해 처음에 그들이 듣고 배웠던 ‘바른 복음’을 기억하고 그 복음을 굳게 붙들고 그 복음에 근거하여 회개하라고 충고하십니다.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처럼 자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처음 받았던 복음을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여 깨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게으르고 늘어지고 풀어져서 삽니까? 이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2절의 ‘죽게 된 것’(에벨론, 헬)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입니다. 그 시제는 ‘아주 절박한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의 현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자다운 삶이 제대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습니다. 이 구원의 세 시제를 헛갈리면 다게 교회처럼 죽은 행위들을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여러분은 창세 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고 이 제 장차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구원은 회심과 성화 그리고 영화를 다 합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신분적, 운명적, 영적인 몀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홍해를 건넌 것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 시작하신 것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광야를 가시면서 구원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고, 아직(not yet)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제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지금 그 구원 받은 자 답게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해 가고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그리고 오늘 교회에,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낮이 되었는데고 밤처럼 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살아난 자로서의 감사와 감격의 삶이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죽어 있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데 교회의 본질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태양열 전등 예화 설명)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이 표현을 오늘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해 보면, ‘은혜 받는 자리로 나오라, 기도하는 자리로 나오라, 예배의 자리로 나오라, 말씀의 자리로 나오라’는 것입닝다.
주님은 지금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가 이름만 살아 있는 자로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정상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과 심판을, 그리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루 하루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백성들은 ‘오늘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바른 복음, 바른 말씀에 근거한 옳은 행실이 있으십니까? 그 옳은 행실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아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깨어 나십시오. 주님께서 권면하실 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그 음성에 반응하십시오. 오늘 이 시간도 성령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깨아나셔야 합니다. 아니면 오늘 말씀처럼 도적같이 여러분의 종말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고난과 수고가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합당한 자들의 삶이요, 예수님의 피로 흰 옷을 입은 살아 있는 신자들의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시고 열심히 믿음으로 살고 사랑의 수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삶은 사는 자들은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라리”
마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며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며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라라” 주님이 시인하시겠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람 앞에서 주님을 삶으로, 입으로 시인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입으로가 아니라 삶으로도 주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살아낸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십시오, 삶을 믿음으로 끌고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은 3개의 동사(Verbs)로 실천과제를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하라’(헬, mnomoneuo, 므노모네우)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받고 들은 바른 복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고 방향을 정할 기준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키라’(헬, tereo, 테레오) 이 단어는 ‘순종하다’ ‘삶으로 사는 것’까지를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바른 복음, 바른 말씀, 바른 믿음을 가졌으면, 마음으로만, 머리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삶으로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킨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회개하라’(헬, metanoeo, 메타노에오) 이 단어는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입니다. 즉각 돌아서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면 성령께서 오늘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돌아서라 혹은 잘 하고 있으니 지금 그대로 쭉 달려라” 어느 쪽으로는 성령께서 하신 말씀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교회가 있는 것처럼, 살아 있으나 죽은 성도가 있습니다.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찬양을 회복하십시오. 말씀으로 사고하는 것을 회복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십니다” 이 시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 정돈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도 사데교회가 희망이 있는 것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 명, 소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몇 명 때문에 사데교회에 다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소수로 인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소수로 인해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세워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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