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두아디라 교회 [계 2:18-29]
18. . .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만 한다면 사람들은 못할 짓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무리 크리스천이 많아져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까요? 종종 사람들이 ‘믿음’의 문제와 ‘행위’의 문제를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좋은데 영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꽃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7개의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이 가장 따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질책이 무섭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지켰던 행위들이 그럴 듯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꽃같은”이라는 표현은 23절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 .every church will know that appearance don't impress me. I x-ray every motive and make sure you get what's coming to you." 무서운 심판의 말씀인데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겉모습으로 예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x-ray를 통해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은밀한 죄, 부끄러운 죄, 부지중에 지은 죄, 의도적인 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와 동일한 칭찬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편지에도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 말씀인데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이곳 두아디라 교회에 상당히 실천적 사랑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굳건한 믿음과 소망과 인내를 가졌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내가 네 사업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교회에는 하나님의 사업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전도하고 봉사하고 교육하고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사랑’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끼리, 어쩌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도 관용하고 사랑하는 그런 교회였을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황이 결코 평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이런 도시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겠지요.
넷째,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다섯째, ‘인내’를 칭찬하셨습니다. 두아디라에 대한 칭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섯째,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바로 에베소 교회가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셨던 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점점 더 나아졌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칭찬의 정도가 거의 완벽하지 않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또 두아디라 교회는 순교의 위기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켰지만, 나중에는 유혹을 당하여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버가모 교회와 분명히 달랐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가면 갈수록 처음보다 더 잘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이 몰아치는 형편에서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행하는 도시에 살면서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님을 더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열심을 다 하느라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우리 신앙의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희생과 인내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여자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고속도로 휴게실이나 공공 화장실에 보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요? 아마도 오늘 말씀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을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일 이후의 흔적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 가운데 선한 영향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책망이 있었습니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앞에서 하셨던 칭찬이 무색하게 긴 책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상실한 그 어떤 덕목도 하나님 앞에서 책망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그 도시에서 영향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를 하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십니다. 제가 요즘 한국교회 언론에 가서 설교한 것이 바로 “거룩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어도 거룩함을 상실하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것이죠. 아마도 환경의 영향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칭찬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섭게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거룩함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두아디라 지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55km 떨어진 소아시아의 내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만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루커스 니카토 1세에 의해서 건설되었고, 그의 딸의 이름을 따서 두아디라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군인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어서, 두아디라시는 군사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시는 비록 소도시였지만 양모, 세마포, 의류, 염료, 피혁제품, 청동제품, 등을 취급하는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나오는 빌립보교회의 첫 번째 성도였던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 비단 장사였습니다. 두아디라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길드’라는 동업조합이 아주 성행해서 조합원이 되어야 취직도 되고, 은행거래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이 도시의 정치, 경제, 사회, 더 나아가 종교에 까지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동조합은 자체적으로 섬기는 수호신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자기들이 섬기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진탕 놀았는데, 이때 여인들을 불러 들여 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실명인지 아니면 구약에 등장하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을 비유하여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망의 핵심은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일어난 교회의 일, 즉 "거룩함의 훼손"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등장하는 동사 "용납함이니"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사랑의 수고와 인내와 믿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이세벨의 행위를 용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무감각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도시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두아디라에는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드' 즉 조합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거기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소속이 된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부도덕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러한 사회적 환경가운데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때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아니면 은유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고 "용납하라고"제안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음을 편하게 하므로 양심을 무디게 하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 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두아디라에는 걸출한 믿음의 여인이 있었지요. 자주장사 루디아로 알려진 여인, 그래서 사도 바울을 돕고 자신의 집을 내주어 교회가 설수 있도록 했던 한 여인입니다. 당시 사회적은 상황을 생각한다면 여인이 그런 사업을 하고,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집을 내어놓는 단순한 희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어쩌면 단순한 자주장사가 아니라 당시 패션을 주도하는 사업가 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한 걸출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게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속에 생각되는 것은, 우리 교회 가운데 루디아와 같은 여인이 많이 나오기를, 그리고 이세벨과 같은 유혹가운데서 이기는 자들, 그런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이세벨'을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거룩함이 훼손된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랑이 없어서, 봉사와 섬김이 없어서, 믿음이 없어서,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거룩함이 상실되어 가면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기 시작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된 어떤 수고와 활동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룩함"이란 진정한 교회와 교인들이 가져야할 또 하나의 표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 곳곳에서 거룩함이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좀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기에,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거룩함을 막으려고 방해합니다. 거룩함이 훼손되는 곳에는 틀림없이 사단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용납하는 것과 죄인을 용납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만 죄를 용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그들의 나약함, 죄에 대한 그들의 관대함이 역사 속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 뿐 아니라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보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그 분 앞에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 ." 그 주님 앞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악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면 심판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들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히브리서 4장 13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그 눈이 불꽃같고 또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경고가 무섭고 중합니다. 오늘 본문 21-23절을 보세요.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중요한 것은 이 여선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은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죄를 짓는 것 보다 죄 지은 다음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합니까?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수가 아니라 범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꾸짖는 이유가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인 것처럼, 오늘 무서운 심판의 말씀역시 협박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바로 그 분이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21절), 그들이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징계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가 열려 있음입니다.
그들을 침상에 던지고.. .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 무섭습니까?
여호수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데 전술을 배우거나 무술을 연마하게 하거나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고, 성결의식을 치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가나안은 극히 세속적이고 타락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문화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결'의 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사실 이 시대의 문화는 가나안 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속적이고 반(反)기독교적 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혀 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상당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임을 떳떳하게 밝히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No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No!"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No!"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노우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과 성결을 위해 단호하게 "No!"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소그룹(Accountability Group)을 형성하라’고 합니다. 개인이 혼자 거룩해지려는 노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서로 체크해주고 서로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거룩함이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 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결함을 통해 주님과 동행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과 권세를 주십니다. 오늘 두아디라교회에 주시는 경고가 심판이 아니라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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