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의 족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5)

 

 

오늘 본문은 귀한 아들 아벨을 잃어버리고 마음 아파하며 서러워하는 아담 부부를 위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주신 귀한 아들 셋의 족보입니다. 셋의 족보는 다윗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어지는 가장 경건하고 귀한 족보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이 족보에도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 필요 없는 말씀이 한 절도 없습니다. 모든 말씀에 하나님의 약속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등불이 되는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지금 107호에 묵고 있으니 시편 107편을 한 번 읽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시편 107편을 읽는데, 얼마나 은혜로운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특별히 20절 말씀이 눈에 번쩍 들어왔습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어 사람을 고치시고 치료하셔서 새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위경이란 영어로는 무덤(the grave), 파멸을 뜻합니다. 무덤에 들어가면 끝입니다. 그러나 끝난 것 같은 가정, 끝난 것 같은 부부관계, 끝난 것 같은 회사, 끝난 것 같은 내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으켜 주실 수 있으십니다. 말씀을 보내어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건져내어 부활시키신 것처럼, 다 끝난 인생이나 다 끝난 가정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연히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 주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고쳐 주시고 우리의 삶과 상황도 치료해 주시고 건져 주셔서 우리 모두가 구원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이 족보를 많이 읽었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읽고, 여기에 와서도 읽고, 오늘 새벽에도 읽었는데, 여기에는 일정한 리듬이 있습니다.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았고 누구를 낳은 후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노래하듯이, 시를 읊듯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리고 각 절의 마지막에는 “죽었더라”라는 말이 찬송가의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셋이 죽었더라. 에노스가 죽었더라. ○○○가 죽었더라. ○○○ 죽었더라…….”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람은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만 아무도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사람치고 ‘죽었더라’라는 말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장수하는 것은 복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왕께 인사할 때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생신이나 회갑, 칠순에 “아버님, 어머님.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축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마다 “생기 찬 얼굴을 보니 120세까지 팔팔하시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축원입니다. 만일 신하가 왕에게  “폐하, 일찍 돌아가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한다면 목이 달아날 것입니다. 부모에게  “어머니, 아버지. 제발 일찍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는 불효막심한 놈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에게  “아이고, 집사님. 얼굴을 보니 두 달 안에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인사하면 그 사람이 기분 나빠서 교회에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10 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장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받아 아무리 장수해도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따라 합시다. “영생은 내 것이다. 

영생은 내 것입니다. 영생은 내가 받았고 아무도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천사도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로마서 8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육신은 한 번 흙이 되어야 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기 전에 재림하시면 우리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흙이 되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 그대로 홀연히 변화되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우리 생애에 주님의 재림이 없으시면 우리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남자는 모두 다 군에 가야 합니다. 저는 육군, 제 사촌 동생은 해군에서 제대했습니다. 그런데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듯이 묘하게 빠져나가 군에 가지 않는 사람이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9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같은 귀한 목사님도 흙이 되셨습니다. 조만식 장로님같은 보배로운 분도 흙이 되셨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어느 날 흙이 됩니다. 영원히 살 수가 없습니다. 시계는 고장 나면 멈추어서 가지 않습니다. 시계는 멈추어도 시간은 아주 정확하게 흐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생명은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 귀하고 아까운 시간을 소중하게 후회 없이 잘 써야 됩니다. 빈둥빈둥 놀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입니다. 돈은 잃었다가 다시 벌 수 있어도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수가 없습니다. 흘러간 강물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흘러간 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보다 시간을 더 아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합니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제 일곱 가지 일을 해야 되는데 아무리 애써도 네 가지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은 많고 시간은 적습니다. “나의 할 일은 산 같은데 백발이 오누나.”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아직도 할 일은 많은데 백발이 오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해야 될 일을 어차피 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중요한 일부터 순서를 정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매우 뛰어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그에게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학생이 그 대학에 답장을 보냈습니다. 

“뜻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장례식을 치르고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학교에서 그 편지를 받고 또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 어머니의 연세가 얼마요?” “우리 어머니 연세가 40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장학금을 취소했습니다. 이 학생은 무엇이 중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먼저 할 일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설교준비 마무리도 해야 되고 할 일이 많고 바빴습니다. 그러나 먼저 찬송을 열 장 올려드리고 성경 열 장을 읽고 기도하고 그 다음에 설교 준비 마무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중한 일은 먼저 예배드리고 말씀 읽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상일도 하며 시간을 잘 활용해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00처럼 재벌이 되고 내가 크게 성공해서 나폴레옹처럼 영웅이 되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을 하며 보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쓸쓸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크게 되고 잘 되어도 하나님께 이익을 못 드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에베소서 1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박일종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박일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업인 여러분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아서 잘 되어 하나님께 이익을 드려야 됩니다. 기업은 기업주한테 이익을 줍니다. 우리도 우리 하나님께 이익을 자꾸 드려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몇 년 살면서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뿐입니다. 자식을 낳고, 낳고, 낳고, 죽었습니다. 따라 합시다. “낳고, 낳고 죽었더라.

남는 것은 자식입니다. 나는 죽지만 내 아들이 있고 내 아들이 죽으면 또 아들의 아들이 사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두고 가는 것은 자식입니다. 이 자식을 잘 길러야 됩니다. 우리만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들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많이 낳자.” 많이 낳아야 됩니다. “전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오, 육십 년 간 말을 타고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책을 200권도 더 쓴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열다섯째 아들입니다. 어머니 수산나가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만일에 열 명만 낳았다면 웨슬리는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셋의 족보는 육신의 족보입니다. 하지만 영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신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두 가지 족보를 가졌습니다. 내 육신의 족보와 영의 족보가 있습니다. 영의 족보는 영적으로 흐릅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은 영적으로 내 자녀가 되는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도 4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칼빈도 “목사는 믿음의 아버지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계시고 육신의 부모가 계십니다. 또한 믿음의 아버지도 계십니다. 목사님은 말씀과 기도로 성도들을 양육하기 때문에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 목사님은 내 믿음의 아버지야.’ 하는 사람은 복 받을 겸손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잘 인도하라고 저를 여기에 심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여름이 되면 목자들이 양들을 끌고 험한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양들은 숨이 가빠 헐떡거리고 땀을 흘리면서 ‘왜 이리 심술궂게 우리를 고생 시키나?’라고 하겠지만 , 목자를 따라 올라가면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그때 그 양들이 깨닫습니다. ‘아! 목자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이렇게 끌어올렸구나.

여러분,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이 잘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목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양이 아니라 염소입니다. 

그리고 목사만 믿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를 전도한 사람도 내 믿음의 아버지가 됩니다.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자녀, 믿음의 자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자녀를 많이 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해서 한 영혼 한 영혼 전도하면 그들이 다 내 믿음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천 명을 전도해서 열 명 정도 세례 받게 하는 것보다 백 명을 전도해서 팔십 명에게 세례 받게 하는 것이 더 귀합니다. 많이 전도하는 것도 중하지만 전도한 영혼이 세례 받을 때까지 알차게 잘 양육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셋의 족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교훈, 자녀가 잘 되는 교훈, 전도 열매를 많이 맺는 교훈을 줍니다. 이 교훈의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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