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 10:1-4, 19:28)

 

 

성도를 일컬어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 근거하면 이 언약은 창세전에 세워졌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글자 그대로 창세 전에 세워진 언약입니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맺은 언약이란 말입니다. ?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맺은 언약이라고 한다면 피조물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언약을 지킬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생기기 전에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킬 수도 없구요.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은 피조물과의 언약이 아니고 창조주와의 언약인 것입니다.

창조주가 누구신가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에요.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세요.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간에 맺은 언약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을 집행하시는 분이므로 실질적으로 언약을 맺은 주체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을 아들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 안에서 만물이 나왔어요. ( 1:3)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아들이신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그가 창조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 속에 포함이 된 우리는 언약을 지킬 대상이 아니고 아들이 지킨 언약의 혜택을 누릴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해요. 선물이에요. 구원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상자를 열면, 그 속에 긍휼과 사랑, 그리고 덮어주심이 있어요. 한마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구약과 신약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그의 역사(HiStory)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시는 모든 일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진행하시는 모든 일은 은혜에요. 은혜 아닌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사는 것도 은혜이고 죽는 것도 은혜에요. 흥하는 것도 은혜이고 망하는 것도 은혜에요. 삼상 2:6-7“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죽이고 살리고! 내리고 올리고! 가난케 부하게! 낮추고 높이고 하시지요. 모두가 극과 극이지요. 요즘 한창 유행하는 말처럼 우리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신다고요? 하나님이 하세요. 누구에게 하시는가요? 자기 백성들에게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 말씀조차도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편집을 해서 들어요. 그래서 복 받는다는 말을 하면 좋아라 하고 반대는 흥미없어 합니다. 이걸 마음이 할례 받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야 한단 말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늘로부터 나는 것을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모두 땅의 것에 마음을 두고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마음에 할례를 받게 되어요. 그럼 성경이 하늘에 이야기로 들려지고 보여져요. 하늘에 소리로 들려지면 사무엘이 말하는 흥하고 망하는 소리도 다 복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들려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환경이나 조건이나 상관치 않고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과 기도를 하지요. 감옥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과 실라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의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더 없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복음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목자라구요? 하나님이! 우리가 부르는 그 하나님이 목자시라구요. 그런데 그 목자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한다고 합니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극과 극인 환경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푸른 초장이 복의 자리라고 한다면 사망의 음참한 골짜기는 저주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복의 자리와 저주의 자리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길로 인도한다고 하나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에요. 3절을 보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에 길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무슨 길이라고요? “의()에 길”이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의()에 길!하나님의 의() 안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예수 안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의()가 나옵니다.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 믿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의()에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예수 안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인은 생래적(生來的)으로 의()에 길을 갈 수 없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누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은 자기를 믿지 남을 믿지 않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믿던 자리에서 예수의 행위를 믿는 자리로 인도하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자리에서 의()에 자리로 나아가도록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간섭이 우리에겐 엄청난 아픔으로 다가와요. 왜냐하면! 우리 것()을 빼앗아가는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간섭이 때로는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나요. 포로 잡혀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말입니다. 내가 의지 하던 것을 의지 할 수 없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린 우리가 의지하던 것을 빼앗기면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포로 잡혀 가는 것을 저주이고 재앙이라고 생각하지 복이고 평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예레미야를 통하여서 알려 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29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내가 죽는 자리, 내가 부인 되는 자리가 평안이라고 합니다. 믿으세요? 

그러나 그 누구도 예레미야의 위로를 위로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 그런 줄 아세요. 모두가 하나님을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왜곡된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애굽에서 알아진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섬기게 된 것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깨트려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는 달음질 잘하고 있는 자를 걸려 넘어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면 안되니까 넘어뜨린 것입니다. 넘어지게 한 것이 사랑이에요. 하지만 달음질을 열심히 하는 자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니고 저주로 보여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도움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항상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될까요? 감사하겠지요.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날 넘어지게 해 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감사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은 지금 자기 백성들이 잘못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막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걸려 넘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그를 예수에 걸려 넘어지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무지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의()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나옵니다. ()?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들도 자기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자기 의()가 맞다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는 서로 용남 할 수가 없어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개그로 처리)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나라의 의(), 인간의 의()는 이 세상의 의()에요.

하늘과 땅은 천국과 지옥처럼 달라요. 천국과 지옥은 서로 용납이 안 되어요. 상대를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마치 빛과 어둠과 같아요. 자석이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 것이 옳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옳든지! 하나님이 옳든지! 내가 옳으면 하나님이 틀린 분이고! 하나님이 옳으면 내가 틀린 것이 되잖아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까? 최종적인 판단을 누가 내리느냐 입니다. 판단 내리시는 분이 바라는 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선()하다고 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악()하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판단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행위로 구원이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 하나님의 의가 있음을 의지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통고하신 하나님의 심판 기준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 앞에 자기 의()가 거부되는 일들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해요. 이건 우리더러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부인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늘 자기 부인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란? 호흡이 있고 눈만 뜨면 자기 의()를 쌓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가 부인이 되는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를 포기하지 못해요. 본능적으로 사수합니다.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따라 다니면서 허물고 깨트리세요. 바벨탑을 보세요. 

그럼 우리는 가만 있지 않고 반발합니다. 가인처럼 왜? 내 제사를 거부합니까? 라고,,, 그래서 급기야는 하나님을 죽이는데 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자기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있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신앙의 싸움은 의() 싸움입니다. 누구 의()를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만 고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자기 의()? 인간에게서 나온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도 의()가 있고 인간도 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의()는 행함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10:1-10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지금 바울이 지기 동족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말합니다. ? 안타까워하나요?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냥 복종치 않는 것이 아니고 힘써 복종치 않는다고 합니다. 힘써 복종치 않는다는 말은 극렬하게 반항하는 것을 말해요. 마치 가인이 자기 제사가 거부당하자 안색이 변하고 분()이 가득하여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과 같아요.

바울은 지금 자기 동족들이 가인처럼 분이 가득하여서 힘써 하나님께 불순종하고고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고 있나요? 자기 의()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지키고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뭔데! ? 나를 틀렸다고 하느냐! ?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느냐! 사람은 기분 나쁘면 참지 못해요. 기분 나쁘게 하는 자는 응징하여야 해요. 사람은 자기가 부정당하면 가만이 있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어떻게 그렇게 대우해..라고 말이죠. 우린 자신도 모르는 것 같은 이 끔찍한 사실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처절하게 깨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와 예수를 믿는 의 둘 다 옳다고 하면 참 좋겠는데! 하나님은 이 두 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만 허용해요. 하나님은 왜? 인간의 의()를 거부합니까? 이는 인간은 죄 아래서 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는 죄()가 나오고! 의인에게서는 의()가 나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와요. 이게 진리에요. 이와 같이 죄인에게는 죄()가 나오고 의인에게는 의()가 나와요.  

그럼 의인이 누구인가 물어야지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누구냐를 알아야겠지요. 그 의인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 예수님만이 의인입니까? 이는 예수님은 아담의 혈통으로 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에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죄가 없는 분이에요. 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나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자기 백성들인 우리 대신 모든 아픔을 직접 다 겪으시고 우리를 그 아픔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대속이란? 내 대신 다른 사람이 값을 치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치루어야 할 값을 대신 다 치루신 겁니다.

어떻게 값을 치루었나요? 자신의 죽음으로 치루었어요. 우린 죄 아래서 난 자들입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은 죽음이라는 값을 치루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삯이란? 값이에요. 죄의 값이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 죽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치룬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항상 인간의 의()를 부정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율법의 마침”( 19:28, 다 이루었다)이라고 하시지요.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어요. 율법이 뭐냐?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에요.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잡이에요.

3:23-26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인도 한다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 의()? 하나님의 의()에요.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마침이란 “텔로스” 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문제가 끝났음을 의미해요.“끝^^예수 믿으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이 자기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십자가에서 대신 다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성도들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에요. 그럼 이제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렇게나 막 산다는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윤리도적적으로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막 산다는 것은 내가 주인되어 내 맘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자기 마음대로 막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우리들의 삶에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내 義를 자랑하지 못하도록 지독하게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노아 방주와 같아요. 방주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에서 어떤 풍랑이 일고 폭우가 뿌려도 안심해요. 풍랑과 폭우는 방주가 다 막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의 뜻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마침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인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안 우리들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며 찬양하는 길 밖에 없잖습니까?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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