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 8:31-32)

 

 

여러분 각자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정의가 있으실 것입니다. 000분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하면, 보통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자신의 경험과 성경지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도 시간이 있다면 한 번 다 들어 보고 싶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자신의 경험에 따른 그 하나님을 한 번 크게 불러 보고 시작할까요. 제가 1.2.3을 세면 시작합니다. 1.2.3.. ‘000 하나님~’

 

 7:9절 말씀을 읽어 드리면서 오늘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아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높은가, 하나님이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인인가?”하는 부분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가 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에 대해서 애정을 갖고 있으며 저들을 복된 곳으로 인도하고 그 일을 위하여 간섭하시는 분이며 그 간섭(섭리, providence,  3,  1)을 이루기 위하여 신실하고도 열심과 끈질기도록 그 일을 마무리 지으시는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꾸 설명하십니다. 

 

제가 읽어 드린 신명기 말씀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너희들이 가나안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너희가 복 받을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까지 인도했단다를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실하심,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시는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갖고 있는 힘,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권세 등을 이용해서 내 소원을 이루려는 머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납득시키며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반응시키려고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을 경험하여 아는 지식이 부족합니다.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아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믿음의 고백들이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언약’(Covenant)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약속하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이 말에는 그러면 복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고 이스라엘과 약속을 하십니다.  약속’, ‘언약은 구약의 아주 중요한 신학적 흐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약, 신약이라고 합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한 내용의 결과를 갖고 있지 않을 때, 그 결과를 지금 보여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니다. 예를 들어,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의 결과는 내일이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A B에게 무엇을 사주겠다 하면 그것을 사주는 행위가 있어야 B가 물건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전에(before) 하는 것입니다. 이 약속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이해시키려는지를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창세기 15장의 이야기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하시는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께 인간 즉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찾아 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하나님) “네 자신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 줄을 내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8)”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러 저러한 재물을 반으로 쪼개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캄캄한 어둠이 내리고 하나님께서 홀로 그 사이을 지나가십니다.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맹세의 습관으로 언약을 맺는 쌍방간에 언약을 위반한 자는 어떠한 벌을 받으리라는 뜻으로 재물을 쪼개놓고 언약 당사자 둘이 걸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을 어기는 자는 이렇게 갈라져도 좋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 이 약속을 어기면 내가 갈라져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런 표현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약속, 언약을 아브라함과 했는데, 아브라함에게 걸어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혼자 가십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혼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 약속을 다 이루셔서 우리 역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정말 하늘의 별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약속을 이루셨구나!’ 여기서 멈추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결과보다 더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도 신앙’(누구를 믿고 무엇을 바라는지)이라는 것으로 얻어지는 결과에 더 관심을 둔 나머지, 신앙자체의 가치는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바국서를 보면 2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큰 능력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관계로 찾아오시며 믿음의 대상으로 대접하신다는 것이 이미 이고 거기에 비교할 만한 어떤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박국처럼, 펄펄 뛰면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웃음과 울음의 감격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난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3:17-18) 할렐루야 ~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하고 가르치시고 알기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냐?’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6:4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쁘게 보이면 복 받고, 하나님께 밉게 보이면 벌받는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 받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벌받는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하신다. 바로 이것을 성경 66권이 시종일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피를 토하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그렇구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믿음 만한 분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의 못난 것을 극복하고 다 덮으시면서까지 찾아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것으로 찾아 오시는 하나님, 신실하심과 우리를 사랑하심과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려고 우리가 이해 못하여 현실에 불평을 말할 때에도, 묵묵히 다시 찾아 오시는 사랑의 손길, 그 변함없으신 손길을 바라 보시고 오늘을 일어서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워봐서 잘 알지 않습니까? 자녀한테 마귀할멈 소리 안 들으면 엄마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좋아하는 대로만 기를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들어야 하고 자녀에게 “Stepmother/father인가 봐의심을 사야 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자녀를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치 의사가 치료할 때 환자가 아프다고 난리 치는 것을 듣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화상 치료를 할 때는 특별히 그렇습니다. 화상을 입으면 피부가 쪼그라드는데 화상 입은 부위를 전부 벗겨내서 피를 내야 합니다. 피가 나야만 제대로 세 살이 나옵니다. 마취도 안하고 가죽을 벗겨내야 하는 데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환자가 사람 잡는다고 악을 쓰면서 막 욕합니다. 자기 고져 주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의사가 치료를 포기하고 내버려 두면 쪼그라든 피부를 갖고 평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 후회합니다. ‘그 의사는 내가 욕좀 했다고 하다가 마냐, 돌파이 의사구만

 

참된 의사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방식, 그런 방식으로 해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의 찬송과 경배와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이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 높으시고 전응하신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복 주심으로 나를 존귀하게 여겨 주시고 내게 찾아와 주셔서 간섭하시고 나의 손을 놓치 않으십니다.” 이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노예가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라고 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시고,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도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 31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말씀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은 내가 받은 구원이 영원한 것, 그 운명이 바뀌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하면 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시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목표하시고 행하신 일을 실패하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근거하여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신실하신 하나님,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단 말이냐 ~.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갖는 구원의 확신의 근거입니다. 할렐루야..~~

 

자기 경험과 본인의 확신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신자 맛나?” 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이 up and down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우리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찬양과 감사입니다.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구나. 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회복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찬양 같이 하실까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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