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과 안목 ( 37)

 

 

 

이제 조금 있으면 런던 올림픽이 개막됩니다. 전 세계의 관심이 런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성화가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해서 런던에 도착하면 지구촌의 스포츠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올림픽의 꽃은 마라톤입니다. 마라톤을 해 보시 적이 있습니까? 마라톤은 우리의 삶에 어떤 유익을 줄까요?

마라톤과 100m를 달리는 방법은 다르다. 

 

마라톤 선수들이 42,195km를 연습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사점을 넘어서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마라톤 연습을 하는 중 '달려 오는 자동차 바퀴에 뛰어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이걸 또 왜 했을까? ....등 뛰는 내내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 뛰고 나서는요, 엄청 기쁘다는 것이예요. 죽을 것 같은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참고 끝까지 달렸다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위로가 되어 힘이 막 솟아 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다 뛰고 났을 때의 그 기쁨을 알기 때문에 참고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내딛기 힘든 것만 생각해서는 절대 못 달린다는 것입니다. 긴 호흡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 고통 스러워도 이 순간을 넘어서면 내 육체가 건강해지고 내 정신이 건강해지는 그 기쁨을 알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없으면 달릴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인생 여정에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마라토너와 같은 긴 안목일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삶의 조각 조각을 붙들고 있지 말고,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내다보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차게 내딛는 마라토너의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믿고 멀리 있는 소망을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에게 긴 안목과 호흡이 없었다면 그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는커녕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참으로 차갑고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요셉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인생에는 이러한 순간들이 때때로 찾아오는 것은 진리이다. 신앙의 여정에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장차 망할 이 성에서 저 천성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하나님은 영생의 꿈을 주신다. 남들을 살리는 영적 성공에 대한 꿈을 주신다. 하지만 난데 없이,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져 버리자"와 같은 차가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꿈을 꾸었다고 해서 꿈이 있다고 해서 그 꿈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꿈이 귀한 만큼 거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꿈을 이루는데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마라토너의 긴 호흡과 안목으로 절망하지 말고 그런 대가들을 치러내야겠다고 결심합시다. 

 

그렇다면 꿈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오셉의 생애를 좀더 따라가며 오늘 우리의 삶을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얼마만큼이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우리네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냄새나는 존재인지를 시대별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다가오자 형들은 반갑다는 말도 없이, 장자권의 증표요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인 그 채색옷을 벗겨 버렸다. 형들의 마음 밭에 이미 미움의 씨가 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움의 씨는 큰 나무가 되었고 거기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쓰디쓴 열매들이 달여 있었다. 그 악한 열매가 형들의 마음에 이미 가득차 있었다.

 

이처럼 마귀는 늘 시기와 질투와 같은 인간의 악한 성품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꿈을 품은 자'를 공격한다. 그래서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웅덩이는 그냥 흙구덩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사막 건조 기후이기 때문에 물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했다. 그러니 그곳 사람들은 우기에 물을 받아 놓았다가 건기에 사용했다. 그래서 물을 받아 놓은 물웅덩이가 땅 곳곳에 있었다. 이 물웅덩이 모양은 마치 큰 항아리 같았다. 물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땅에 크고 깊게 구덩이를 파 놓되 물일 수증기로 증발하지 못하도록 입구는 아주 좁게 만들었다. 돌덩이 하나로 막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입구를 좁게 만들어 물을 오래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요셉이 바로 이러한 물웅덩이에 던져진 것이다. 다행이 물이 없었다. 형들은 동생이 죽어 가고 있는데도, 목이 메어 고통 가운데 부르짖고 있는데도 음식을 먹었다.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아마도 이 음식은 요셉이 집에서 가져온 음식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이만큼 잔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사하고라도 만약 내 사랑하는 자녀가 수술이라도 받는다면 밥이 어떻게 넘어갈까 싶지만, 인간은 이렇게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존재이다. 

 

 6: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인간의 질투와 시기는 이런 안타가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도 질투라는 잔인한 인간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지난 수천 년간 가인과 인류 역사를 지배했던 질투의 유전자는 지금도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리고 있지 않는가...

 

아브라함의 가계는 믿음의 가계였지만 불행하게도 속임수라는 전통도 내려오고 있다.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 집안 사람들에게는 속이는 데 남다른 은사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고 그 버릇 그대로 이어받은 이삭 역시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다. 2대에 걸쳐 거짓말을 하니까 드디어 거짓말의 명수 야곱이 태어나 형과 아버지를 속였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도 그야말로 거짓말에 도통한 도사들이었다.  37:31-32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이들은 지금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뺨치게 열연을 펼치고 있다. 

 

나아가서는 '우리 형제', '사랑하는 우리 동생 요셉'이라고 해도 될 것을,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3인칭을 써서 요셉에 대한 불편한 심기와 시기심을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거짓말의 명인이 거짓말의 도사들한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 좋은 신앙적 전통이 흐르게 합시다. 믿음의 전통이 흐르게 합시다. 

 

인생이 내 맘대로 대지 않고 어떤 것에 의해서 그냥 휩쓸려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지라도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잠언 16:9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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