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다 (24:1-9, 34)

2007 12월에 중국 양장시 앞바다에서 보물선 난하이 1호의 인양 작업이 있었습니다. 난하이 1호는 보물을 싣고 인도와 스리랑카로 가다가 침몰해서 840년간 바다 밑에 있었는데, 이번에 그것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8만 점에 이르는 도자기와 각종 진귀한 보물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격으로 매기기는 어렵지만 줄잡아 1000억달러[100조원]이상이 된다고 하니 중국은 횡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하고 귀한 복, 영원한 복은 성경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깨닫고 가지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더 행복한 이유는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요즘에는 하나님께서 잘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성경을 읽으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말씀이 있어 ‘주여, 깨닫게 해주세요. 깨닫게 해주세요.’ 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야 했는데, 이제는 ‘아! 이런 뜻이구나. 이 뜻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잘 가르쳐 주셔서 참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너무나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제가 성경을 읽을 때 받은 은혜와 행복과 축복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내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엘리에셀이 한평생 아브라함과 같이 사니 아브라함을 닮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삽니다. 세상에! 나홀 성에서 어떻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엘리에셀이 결정하겠습니까? 그 막막한 가운데서 아기처럼 기도하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그대로 들어주십니다.

“아가씨, 물 좀 마시게 해 주세요.” “어르신네, 마시소서. 어르신네의 약대에게도 물을 먹이겠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녀, 따뜻하고 친절한 가슴을 지닌 소녀가 뛰어다니며 약대에게 물을 먹이는 모습조차도 기품이 있습니다. ‘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삭 도련님의 아내감이구나.’라고 느낀 엘리에셀이 소녀에게 금고리와 손목고리를 주며 묻습니다.“아가씨는 뉘 댁의 딸이오?”“네, 저는 밀가가 나홀에게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나홀은 아브라함의 친동생입니다. 그러니 엘리에셀이 감격해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주인에게 사랑과 은혜와 진실을 끊임없이 부어주셔서 저로 하여금 제 주인의 동생 집으로 인도하셨군요.

그 사이에 소녀는 달음질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 그 소식을 전하면서 번쩍번쩍하는 금고리와 금 손목고리를 보여 주니 식구들이 기뻐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아마 양도 잡고 닭도 잡았을 것입니다. 라반이 우물 곁 약대들 옆에 있는 엘리에셀에게 가서 말합니다.“하나님께 복을 받은 분이시여, 어찌 밖에 계시나이까? 어서 저희 집으로 가십시다.

환대를 받으며 그 집에 들어가니 라반이 손수 약대 열 마리의 짐을 다 부립니다. 그 집의 종들도 “어서 물로 씻으시오.”라며 귀한 손님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한 진귀한 요리들을 다 차려놓고 “어서 드세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홀 성까지는 2천 리(800km)가 넘습니다. 그 먼 길을 오는데 2,3주는 걸렸을 것입니다. 그동안 따뜻한 음식 한 번 먹지 못하고 굳은 음식만 먹었으니 부엌에서 요리하는 냄새가 얼마나 코를 찌르겠습니까? 금방 요리한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에셀은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내가 책임진 일을 설명하기 전에는 이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라반이 어서 말하라고 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셔서 창성하게 하시고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많이 주셨습니다. 내 주인께서는 그 모든 재산을 우리 사라 마님께서 노년에 잉태하여 낳은 아드님, 이삭 도련님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그 도련님의 신붓감을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막막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제가 기도한 대로 눈부신 아가씨가 와서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 아가씨가 바로 이 댁의 따님입니다.”그러자 라반과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가 가타부타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리브가가 있으니 데리고 가서 이삭의 아내로 삼으시오.세상에! 일이 어찌 이렇게 시원하고 형통할 수가 있습니까? 

그 일도 그렇게 좋은데 엘리에셀은 마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여기에서 얻는 하나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24 2절에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물을 맡은 늙은 종에게』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에셀은 늙은 종입니다. 당시 종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양이나 소처럼 재산 품목 중의 하나로 취급받았습니다. 인권도, 자유도 없었고 늙어서 일을 못하게 되면 버림을 받았습니다. 엘리에셀이 그런 종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신뢰하여 그 집의 모든 소유물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엘리에셀에게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여!”라며 귀족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존귀한 사람이 되고 어디에 가도 그의 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니 주인인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복을 받아 창성하되 심히 창성했습니다. 열 왕들이 부러워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 버금가는 엄청난 재산가였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앗아가시니 하루 밤 사이에 모든 재산과 집을 잃고 알거지가 됩니다. 아내와 두 사위도 잃고 두 딸만 데리고 토굴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러다 술에 취해 딸들과 잠을 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디에서든 “내 아들을 보시오. 내 손자를 보시오.”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종이라도 복을 받으면 귀족처럼 되는데, 주인이라도 복이 떠나가면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5장에 보면, 유다 왕국의 최후의 왕인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니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사들에게 포위됩니다. 그 성에 기근이 심하고 먹을 것이 없으니 시드기야 왕이 혼자서라도 살아보려고 도망을 가다 바벨론 군사들에게 잡혀 바벨론 왕 앞에 서게 됩니다.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 왕의 목전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다 죽인 다음 그의 눈을 뽑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존귀한 왕이지만 복이 떠나니 개처럼 끌려가서 끝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주인이라도 복이 떠나가면 비참하게 됩니다.그러나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귀족처럼, 별처럼 존경 받는 존귀한 인물이 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크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 크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 6절에서 8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하시면 시골 처녀라도 왕비가 되고 시골 목동이라도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이라도 하루아침에 개처럼 끌려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복을 받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천한 종인 엘리에셀에게 그런 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그냥 “엘리에셀, 내가 오늘 기분이 좋다. , 복을 받아라.” “시드기야,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구나. 너는 망해라.”라고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신명기 30 15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네 앞에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0 19절에도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 길로 가면 복을 받고, 멸망 길로 가면 복을 잃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낙원을 잃게 되고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낙원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해도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잘 아십니다. 거룩하게 살겠다며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저분한 것을 다 아십니다. 

시편 139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욥기 31 4절에도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에셀이 하나님 앞에서 한 예쁜 짓은 무엇입니까? 그는 무엇보다 자기 일에, 자기 책임에 성실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 길을 왔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식을 먼저 먹고 나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시에 정량을 먹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닙니다. 내가 책임진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허락받은 다음 비로소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 계실 때 제자들이 성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해 옵니다. “예수님, 드세요.” “내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어? 우리 몰래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나?”“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분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식사가 중하지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엘리에셀은 자기 신분에 충실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이 직접 짐을 내리고 발 씻을 물을 주면서 귀족 대우를 해주고, 종들도 “하나님께 복 받은 분이여.”라며 큰 손님 대접을 해주면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34절을 보면, 엘리에셀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모든 명예는 주인에게 돌립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I am Abraham's servant.) 하나님께서 내 주인에게 큰 복을 주셔서 심히 창성하게 하시고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많이 주셨고……. 나중에 아브라함이 라반과 브두엘에게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시원해 했겠습니까? 잠언 25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Like the coolness of snow at harvest time,)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refreshes)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일에 신실하고 자기 신분에 신실한 사람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저는 꿈에도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도 더 중한 것은 신뢰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일에 신실하고, 자기 신분에 신실한 사람을 누가 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어찌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 신분만 분명히 밝혀도 존귀하게 살게 됩니다. ‘나는 000이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좋지 않은 곳에 가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어떻게 좋지 않은 곳에 가겠습니까? 따라 합시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점찍어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정체성이 정확하면 삶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한 남자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새벽 3시에 기어들어오듯이 들어와 바로 토했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어 아들을 깨워 함께 남편을 침대에 눕혔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이 눈을 떠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부엌에서는 맛있는 해장국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일어나 보니 집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식탁에는 메모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여보, 나는 당신이 정말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워요. 해장국을 끓여 놓았으니 속 푸시도록 어서 드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신선한 생선을 사러 시장에 갔다 올게요. 여보, 사랑해요.’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벽 3시쯤 기어들어와 아무 데나 토한 것을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기억하는데 아내가 어떻게 이리 잘해줍니까? 그래서 코흘리개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오늘 아침에 네 엄마가 왜 이렇게 잘하냐?

“아빠, 나도 몰라. 어젯밤에 아빠가 술에 취해서 토했어. 그리고 그냥 잠이 들어서 엄마하고 내가 힘들게 아빠를 침대로 옮겼어. 그런데 엄마가 아빠의 바지를 벗기니까 아빠가 ‘이러지 마시오. 나는 임자가 있는 몸이오.’라고 했어.”그 말 한 마디에 아내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남편이 술독에 빠져 있어도 남편의 신분에 충실하니 아내에게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나는 남편이야. 나는 아내야. 하는 마음으로 살면 어떻게 잘못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귀히 여기시고 사람들도 귀히 여겨, 높아지고 형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금산의 큰 부잣집에 하루는 걸인 같은 한 청년이 와서 머슴으로 써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 머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후 머슴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신실한지, 감동을 받은 주인이 머슴을 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머슴이 같은 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앙이 더 좋은 머슴이 먼저 집사님이 되고 먼저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장로님이 되어도 자기 신분인 머슴의 위치에서 주인을 높이고 집안일을 더 충성스럽게 잘했습니다. 나중에 주인도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주인 장로님이 “자네 같은 훌륭한 인품의 사람은 목회를 해야 돼.”라며 머슴 장로님을 신학교에 보내고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다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머슴 장로님이 목사님이 되니 교회를 잘 지어 그 교회로 모셨습니다. 머슴 장로님은 목사님이 되어서도 목사님의 신분에 얼마나 성실하고 충실하신지 교회가 점점 더 부흥하게 되었고, 목사님과 장로님이 전국적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목사님은 총회장이 되셨습니다. 총회장이 되어서도 그 신분에 신실하고 열심히 일하시니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전신학교도 세우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이자익 목사님이십니다. 

오갈 데 없는 머슴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자기 신분과 일에 신실하니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하나님,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살피고 계십니다. 내가 아무리 밑바닥에 있어도 어디에서든 일에 신실하고 신분에 신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세워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창성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복을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이 다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의 깃발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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