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서 은혜를 입고 살아난 자들 (히 11:17-19)

 

오늘 본문에서 이삭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우리말로는 ‘외아들’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이는 독생자라는 뜻입니다. 즉 ‘독자’가 아니라 ‘독생자’라고 합니다. 독자와 독생자가 뭐가 다르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독자와 독생자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 짧은 두 단어 속에 구속사의 메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독자가 아닙니다. 독자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 ‘외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형제가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에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창 25장에 보면,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 6 명이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은 8 명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독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육으로 낳았다는 측면에서 이삭은 독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하는 독자 이삭과 히브리서가 말하는 독생자 이삭은 조금 다릅니다. 창세기에서는 육과 영을 대비하기 위해서 독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는 이삭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본문은 영과 육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지니고 있는 ‘본질’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라고 하지 않고 ‘독생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에서 언급하는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스스로 사는 자’라는 뜻입니다. 독생이라는 말은 ‘홀로 독’과 ‘날 생’ 즉 ‘스스로 산다’는 말의 합성어 입니다. 헬라어로 독생(μονογεν)이라는 ‘모노게노스’는 ‘모노스’(홀로)와 ‘기노마이’(산다)의 합성어입니다. 즉 ‘홀로 사는 자, 독자적으로 사는 자, 스스로 사는 자’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 중에 스스로 있는 자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스스로 있는 자’가 누구라고 말합니까? 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증거하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 스스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 3:16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μονογεν)를 주셨으니…”라는 말에 ‘독생자’란 ‘외아들’ 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잠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니까? 창세전의 언약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창세전의 언약을 위해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역사 세계로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자기 피로 구속하기 위함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려고 역사에 필요한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어도 그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100% 인간이시고, 100%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서 믿는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분석해서 믿으려고 하면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자기 이성에서 벗어나면 못 믿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질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하고 이해를 하려고 하니 자기들이 이해되는 것만 성경에 남겨 두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전부 삭제해 버렸습니다. 신화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안 믿어지니 안 믿으려는 쪽으로 성경에 자신들의 이성의 가위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 믿음을 받은 사람은 어찌 하든지 믿고자 하고,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안 믿으려고 합니다. 예수 ! 예수 !, 복음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안 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감사하고 그 은혜를 누리고 사세요.”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 열심히 할 것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안 하는 쯕으로 움직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겐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그렇지 않아도 하기 싫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서 안 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꼭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습니다. 예수 믿기 싫었는데 잘 되었다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이 이 사람이 가짜인지 아니지 확인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라고 하면 그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해서 주님을 더 사랑하는 쪽으로 몸을 움직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동일한 원리로 복음이 이 사람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얼마나 다르니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쪽은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한쪽은 살고 살려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동격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발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이므로 반드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참람죄’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삭을 ‘스스로 사는 자’라는 의미에서 독생자(외아들)라고 합니다. 자 보십시오. 이삭을 누가 낳았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았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창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עֲקָרָ֑ה:rooted up, plunk up) 자식이 없었더라” 그리고 이삭을 준다고 했을 때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안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삭은 하나님의 자식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실 때 ‘아브라함에게 내(하나님) 아들을 바쳐라’는 말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바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맡겨둔 것을 다시 찾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창 22:2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네 아들”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네”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이삭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이삭은 창세기엔 아브라함의 아들로 나타나고, 히브리서엔 하나님의 아들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독자’라고 하고, 히브리서에서는 ‘독생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약속으로 주어진 유일한 아들로서 독자가 되지만, 히브리서에는 부활의 주님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독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요. 요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이스라엘 공동체 혹은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 장자란 맏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예수님이 하실 일을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라는 가정에서 일어난 자식들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가문 이야기로 보지 않고 예수님의 이야기로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자식입니다. (마리아도 그렇죠.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그런데 성경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구속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것만 받으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이삭 대신 숫 양을 잡게 하셨습니다. 그 숫 양을 누가 준비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 산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즉 하나님께서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표현하면 이삭 대신 죽을 제물을 하나님이 보내신다,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인물 속에는 “이중계시”가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자 보세요. 

이삭은 독생자라는 의미로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리아 산에서 제몰로 드려질 때는 이삭 대신 죽어진 숫 양이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이러면 이삭은 누구의 모형인가 하면 성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 자들을 위해서 모리아 산의 숫 양과 같은 제물을 친히 보내 주시는데 그 제물이 바로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제물이 신약에선 누구입니까? 예,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산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신약에선 예수님 때문에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난 성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이삭을 다시 받은 것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 11:18-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히브리서를 쓰는 저자에게,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어떤 자들이냐 하면서 이삭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자손들이 누구 때문에 살아 나는 줄 아느냐? 숫 양과 같이 하나님이 친히 보내 주신 예수님 때문에 살아 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숫 양입니다. 신약으로는 예수님입니다. 그럼 이삭은 누구 안에서 살아난 것입니까? 예수님 안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바쳤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을까요? 그걸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아브라함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당연히 믿음이지요. 그 믿음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런 내용을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더러 이렇게 하라는 것일까요? 자식 바치라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나는 안 믿는다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은혜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신 은혜가 나를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보내셔서 제물로 준비되시고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참 성도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노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빌 3:8-9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난 자들입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