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하게 나갔더니 비어 돌아오게 하시네 ( 1:19-22)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 일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인간은 길을 잘 가다가 마치 길 잃은 나그네를 표현하고 있는 것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정말로 길을 잃은 상태일까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복음이 들려오면 세상은 반드시 두 부류로 나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러 오는 부류와 말씀을 배척하는 부류로, 즉 예수와 연합되는 자들과 예수를 싫어하게 되는 자로 나뉘게 됩니다. 예수를 못 알아보니 길을 잃은 것입니다.  14: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길이라고 하신 예수를 모르니 길을 잃은 것입니다. 축복, 생명을 모르는 것입니다.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나오미가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축복이라면 왜? 빈손으로 돌아오는것이 왜? 축복인가요? 성공하여 부자가된 것이 축복이 아니고 망하고 다털어 먹고 거지로 돌아오는 것이 어째서 복인가요?

이 세상은 힘의 나라 입니다.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집니다. 자연히 힘있는 자가 강한자이고 성공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너도 나도 힘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몸은 힘의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힘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힘있는 사람 앞에 선 주눅이 들어요. 이건 내가 힘을 가져 보면 알아요. 이 세상에선 힘 있음은 성공이고 힘 없음은 실패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시상식에서 상을 하나 받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구 경기에서 골을 하나 넣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공격수는 하나님께 골을 넣게 해주어서 영광을 돌린다고 하고, 골키퍼는 골을 안먹어서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합니다. 공격수의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합니까? 골키퍼의 기도를 들어 주어야 할까요?

? 이런 하나님이 교인들 머리에 각인이 되었을까요? 이는 성경을 닫고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교회사 속에서 늘 반복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구약교회를 보고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백성이 무지하여 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울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이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간증이 요즈음 교회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간증합니다. 흥하게하는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하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간증이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 입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만났다고 증거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는 나는 망하게하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을 비교하면 뭔가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삶 자체가 늘 사건의 연속인 겁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성도를 간섭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으면 잠시라도 가만 두지않고 간섭을 하시느냐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너무 간섭을 당하므로 싫은 겁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 안에 있는 성도는 늘 사건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란 말은 곧 귀찮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오미에게 주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복()입니다. 죽여도 복()이고 살려도 복()입니다. 망하게하여도 복()이고 흥하게 하여도 복()입니다. 아프게하여도 복()이고 낫게 하여도 복()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복() 아닌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는 나오미처럼 남편을 잃고 두아들을 잃어도 복()입니다. 과부가 되어도 복()이에요. ()안에 들어 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다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사실을 바탕에 깔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들지 않습니다. 질문입니다.  15장에 탕자의 망함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베들레헴에 올라오자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여자가 나오미가 아니냐? 이 사람이 진정 나오미란 말인가? 이말은 환영과 비웃음이 섞여있는 말입니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돌아 오려면 성공해서 돌아 오든가 하지 거지가 되어서 돌아 오는건 뭐냐는 것이죠.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짐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기 경내에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있으면 그들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15장을 봅시다. 하나님은 법으로 이스라엘 경내엔 가난한자가 없도록 하셨어요. 한마디로 굶어 죽은자가 없게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동네에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한다고 하면 그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까? 그래서 경내에서 누가 굶어 죽으면 하나님께서 그 동네에 책임을 물어서 징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가 과부기 되어서 베들레헴 경내에 들어 온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이들을 외면하면 베들레헴 자체가 혼나게 생겼어요. 그러니 얼마나 부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나오미는 며느리라는 혹까지 붙이고 왔습니다. 두 과부가 온겁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겐 짐입니다. 그러니 베들레헴 사람들에겐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인 겁니다.

나오미는 온갖 조소를 당하여도 할말이 없어요. 그러자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나를“나오미”라하지 말고“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나오미”란?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만족함이란 뜻입니다.“마라”란? 슬픔이고 괴로움이란 말입니다.“나오미”와“마라”는 전혀 상반된 이름입니다. 한 여인의 인생 가운데 두 가지의 삶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오미의 이 고백 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도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날 봐라!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기쁨잃고 마라와 같은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경험자가 되어서 너희들도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슬프고 괴로운 인생이 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본보기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스스로의 이름을“마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날 똑똑히보세요! 나는 하나님을 떠났다가 남편도 잃고 두 아들까지 잃고 이젠 얻어 먹고 살아가는 거지가 되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떠나면 나처럼 거지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시청각 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는 기쁨의 여인이었지만 이젠 슬픔의 여인입니다. 기쁨의“나오미”에서 슬픔의“마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복자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께 얻어 터지고 이스라엘로 바뀐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도 모압에서 하나님께 얻어 터지고 마라로 바뀐 것입니다. 이건 탕자가 집을 나갈 땐 아들로 나갔지만 돌아올 땐 종으로 돌아 오는 것과 같아요. 좌우 지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슬픔을 안고 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오미는 슬픈 여인이 되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의 베들레헴의 삶은 거듭난 성도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자 같은 자기 백성을 어떻게 기업을 잊게 하는지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망한 가문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저주 받은 인생을 어떻게 축복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앞으로 살펴 볼 내용입니다.

오늘은 나오미의 신앙고백을 살펴 봅니다. 신앙 고백이란? 경험에서 비롯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경험된 것같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추상적인 하나님을 실상으로 만나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십니다. 이 앎을 히브리어로“야다”라고 합니다.

“야다”란 말은 부부처럼 관계로 알아진 앎을 말합니다. 실제 경험으로 알아진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를 배워서 아는 자와 예수와 한 몸으로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를 배워서 아는 자는 신앙생활이 지식으로 흐르고 예수와 한 몸으로 사는 성도는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삶(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선 예수님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이건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시금석이에요. 열매로 나무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철없는 아들이 유산을 상속해 달라고 해서 집을 나간다고 하여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나오미가 예루살렘을 떠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붙잡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 아버지 곁을 떠나겠다는 나오미나 탕자를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을까요? 이는 이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법[죄와 사망의 법]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그 법은 자신이 죽음으로서만 깨어집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 죽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곧 나오미 자신의 죽음과 같습니다.

지금 베들레헴 사람들은 맏아들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하나님을 법으로 섬기지만 나오미는 사랑으로 섬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산자의 하나님이란? 살아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하나님입니다. 객관적이라함은 하나님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이를 주관적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객관입니다. 객관이란 쉬운 말로 타자(他者)란 말입니다. 남이란 말이에요. 하나님도 남이고 아브라함도 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갑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찾아 오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됩니다. 남에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걸 객관과 객관이 만나서 주관이 된다고 합니다.

객관과 객관이 만나면 주관으로 바뀝니다. 주관이란? 남이 아니고 하나란 말입니다. 이걸 경험이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객관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찾아 오심으로서 주관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이 찾아 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관이 바뀝니다. 이젠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만나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갔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 갑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난 자기 백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됩니다. 관념의 하나님이 아니라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하나님이 됩니다.

이걸 성경에선 주()라고합니다. ()? 주인(主人)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주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 곧 구원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인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떠나 모압에 갔는데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기까지 찾아 와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순순히 가지 않으니 날 두들겨 패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분문에선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빈 손으로 돌아 오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해서라도 기어이 자기 땅으로 돌아 오게 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땅이란 하나님의 품입니다. 구약에서 땅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면 내 인생은 늘 간섭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간섭 당하는가 하면 내 인생을 차압 당하는 식으로 간섭하세요. 내마음대로 살수 없게 하신 단 말입니다. 이걸 경험한 사람은 절대로 멀리 가지 못해요. 잠시 어그러진 길로 가다가도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나오미가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린 나오미의 간증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고난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마라라는 이름은 슬픔이란 뜻입니다. 나오미와 마라는 상반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는 나오미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마라가 됩니다. 나오미와 마라라는 이름으로 본다고 하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장소적인 의미를 영적으로 본다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나아간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내려 갈 때는 풍족하게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때는 빈 손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건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돌아 올 때는 거지로 돌아 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는 방식입니다. ? 풍족하게 나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 오게 할까요? 이는 자기 의()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는 우리의()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에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거지로 돌아 오게한 것입니다. 탕자 나나오미가 거지로 아버지 집에 돌아온 것은 죄인이 용서받는 모습으로 아버지 집인 천국에서 살아 갈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들이 살아 가는 나라입니다. 긍휼은 자기의()가 없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천국엔 자기의()가 없는 거지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의()를 빼내게 하시려고 우리 뜻대로 살고자 할 때 막지 않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다 잃을 때까지 금지치 않은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아버지 집을 떠나 거지가 되게 함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나오미 역시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난 후에야 풍족하게 나아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 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 고난이란? 축복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은 고난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비밀이 풍족하게 나아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는 나오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룻기는 우리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복음입니다. 부디 이 비밀을 깊이 알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베드로는 빈 손, 빈 그물을 경험하고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시고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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