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있는 며느리 재혼시키기 (Ruth 3:1-18)

 

성경은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라면 처녀가 결혼해서 남편과 사랑을 나누고 임신을 하여서 아이를 낳았다는 식으로 순차적인 이야기가 전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먼저 나온 세례요한이 늦게 나온 예수님을 보고 자기보다 앞선 형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천년이나 앞서 살았던 다윗이 자기를 보고 주()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러면 미쳤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이야기를 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의 구조가 이러합니다. 육적으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마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도무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8:29) 자세히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줍니다.(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예수님 이야기로 푸니 풀려 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고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를 열어 보이시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미와 Ruth의 이야기 역시 어느 가정의 재혼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나오미와 Ruth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구원 이야기란 말입니다. 구원이야기이기 때문에 나오미라는 한 여인 속에 다양한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오미 그러면 아! 하나님을 떠났다가 하나님께 된통 얻어맞아 돌아온 실패한 여자!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단편적으로 보지 말란 뜻입니다. 

나오미 속에는 죄인의 모습도 담겨져 있지만 돕는자의 모습도 담겨져 있기때문입니다. 이걸 이중 계시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아브라함이 우리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요셉이 우리들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가 나의 모습이면서도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요나도 그렇습니다. 

본문을 공동번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Ruth 3 1절 “어느 날 나오미는 며느리 Ruth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내가 너에게 남편을 구해 주겠다. 너도 이제 재혼을 하여 다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가 Ruth에게 신랑(안식처)을 구해 주겠다고 합니다. 새 신랑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Ruth을 보아스라는 남편에게 중매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후 11:2에서 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니 Ruth을 돕는 자로서 나오미입니다. 바울의 표현처럼, 이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나오미가 Ruth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시집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Ruth을 시집보내는 주체가 나오미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Ruth을 시집보내는 주체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구속사를 누가 이끌어 가시나요? 

얘야! 내가 너에게 남편을 구해 주겠다고 합니다.  Ruth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자식을 얻게 됩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Ruth의 신랑감을 자기가 이미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Ruth을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참 재미가 있지요. 시 어머니가 며느리 재혼시키는 이야기입니다. ? 재혼을 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가문을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초혼이 아니고 재혼이에요. 이걸 기억하세요. (바울은 이것을 롬 7장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재혼을 하게 되면 며느리는 다른 집안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재혼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마치 유대주의가 복음을 거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며느리를 시집보내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오미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영적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나오미가 며느리를 재혼 시키고자 하는 영적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며느리는 가문을 이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집을 와서 남편과 살다가 남편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 남편의 형제가 형수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이는 가문을 잇기 위한 것입니다. 이걸 “시형제 결혼법” 이라고 합니다. 또는 “계대 결혼법” 이라고도 해요. 지금 나오미는 이 결혼을 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알다시피 Ruth의 남편은 형제들이 없어요. 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문이 끊겨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친척 중에서 누군가가 대신 형제 노릇을 해 주어야하는 제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걸 “고엘 제도” 라고 합니다. 대신 담당해 주는 사람을 “고엘” 이라고 해요. 나오미가 지금 그 고엘을 보아스로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Ruth에게 기업을 이어주어야 하는 자로 지목이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고엘 제도를 통해서 가문을 잇고자 합니다. Ruth이 자식을 낳으면 결국 나오미의 가문이 이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Ruth은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하고 시어머니 호적에 입적이 되었어요. 결국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희생으로 자기 가문을 되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Ruth은 나오미의 가문을 위하여 희생당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문은 Ruth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어져 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희생을 Ruth기는 인애, 헤세드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Ruth의 희생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의 희생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Ruth이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Ruth과 같이 희생당한 자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맥을 따라서 오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로운 피조물인 “나” 라는 천국백성으로서의 기업을 잇게 하기 위해서 희생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기업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러니 Ruth이 보아스를 통해 가문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곧 성도의 구원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Ruth이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게 되는 모든 일을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주도를 합니다. Ruth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어요. 재혼의 상대도 시어머니가 골랐어요. Ruth은 시어머니 장단에 춤을 춘 것뿐이에요.

앞서서 나오미를 돕는자라고 하였지요. Ruth이 재혼을 하는데 돕는 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 돕는가 하면 자기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나오미가 Ruth을 돕는 것처럼,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누구 가문을 잇게 하려고 누구를 돕습니까? 예수님의 가문을 잇도록 성도를 돕지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가문 즉 에베소서의 표현으로 기업을 이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계획이라고 합니다. 오늘 나오미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나오미의 열심이 아니라,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해, 나오미가 열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Ruth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주겠다고 합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안식할 곳이 어디입니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은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안식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의도적으로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54:5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라"

여러분의 안식할 곳은 어디입니까? 재혼을 시키는 목적은 안식케 하기 위함입니다. 복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이란? 수고와 슬픔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허물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바울은 롬 8장에 율법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했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안식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저주의 땅입니다. 축복의 땅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늘을 말하고 모압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Ruth은 모압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었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축복의 땅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나오미라는 여인을 통해서 주소지가 모압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영적으로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은 축복의 나라인 하늘 예루살렘에서 저주 받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압이라는 저주 받은 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던 Ruth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땅에서 하늘로 주소지가 바뀝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모압이라는 땅에서 예루살렘이라는 하늘나라로 호적을 옮겨 주셨습니다. 호적이 옮겨진다는 것은 남편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 3:20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에게 시집을 보내서 호적을 옮기게 해 준 것입니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마치 나오미가 Ruth을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Ruth을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잘 알아요. 보아스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를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며느리에게 어떻게 하면 보아스의 사랑을 받는지 그 방법까지 세세하게 다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Ruth에게 보아스에게 나아 갈 때 입어야 할 옷도 입혀줍니다. 어떤 향수를 발라야 할지도 알려 줍니다. 또 보아스를 어디에서! 어떻게! 어느 때에 만나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심지어 어느 때에 보아스에게 애교를 부려야하며!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을 하여야 하는지 까지도 소상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예수님의 속속들을 다 알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있어요. 결국 Ruth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고 보아스로부터 신랑이 되겠다는 약조를 받아 냅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성도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준다고 하셨습니다.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리라"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의 알려 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나오미가 Ruth에게 코디를 해서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Ruth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리곤 결국엔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서 자식을 낳아 무너진 가문을 회복하여 기업을 이어 가게 됩니다. 

신약에 오면 성도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코디를 해 주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의 나오미는 구속자적으로 돕는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한 인물과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 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 성도 안에 계시고 우리가 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주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주 안에 있습니다.

그럼 나는 누구입니까?때론 예수님을 보여주는 “증인”이기도 하고, 때론 죄인으로서의 “나” 이기도 하겠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치 않는 자는 나를 영접치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 이럴 땐 제자들이 하는 말들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세상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에 대하여서 알려 줍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 줍니다. 

성령받고 난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한 예로, 베드로와 요한의 행적을 보세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제자들의 열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마치 Ruth이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서 복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생각으로 소설 읽듯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란? 사건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전체의 내용이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내용 속에는 각각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가 Ruth에게 신랑을 만나게 하고 사랑을 나누어 아들을 얻게 하는 내용은 보혜사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성령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하여 속속들이 다 알고 Ruth에게 그 보아스의 비밀들을 다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Ruth에게 내가 너를 새 신랑을 맞이하는 시집을 보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Ruth은 나오미가 알려준 대로 하였습니다. 보아스 역시 나오미가 Ruth에게 말한 대로 Ruth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나오미가 이방여자 Ruth을 보아스에게 데리고 와서 복을 받게 해 주고 있는 것은 성령이 이방인인 우리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이러한 그림을 크게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예수에게로 이끌어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린 구원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모압여인이고, 흠있는 며느리에게 남편을 찾아주는 나오미의 열심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에게 남편을 찾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열심을 유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Ruth이 나오미의 말을 듣고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조명을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신앙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여기에 내 생각이 들어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합시다. ^^ 우리의 불순종을 회개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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