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생각될 때 : 돌아 가는 길 “나는 이런 삶을 꿈꾸지 않았다” ( 1:6-22)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꿈들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과연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나오미, 기쁨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이 여인에게 기쁨의 조건이 아무 것도 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없는 것의 연속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양식이 없고, 타향으로 떠나니 양식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땅이 없고, 당시에 여인에게 있어서 방패요, 피난처요, 힘이요, 요새인 남편도 없고, 가문의 대를 이어갈 아들들도 없고, 결혼은 했지만 손자도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부끄럽고 내세울 것없는 이방여인 며느리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박국처럼,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1) 포도나무 열매가 없으며(2)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3)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4) 우리에 양이 없으며(5)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6),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시편을 쓴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으리로다 

과연 그런가요? 나의 결핍의 상태-인간에게 있어서 결핍은 두려움을 양산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찾기 위해 일련의 방법들, 인간적인 것들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나오미의 가정은 떠남을 택했다. 이것은 영육간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을 의미한다-를 하나님이 Replace 할 수 있는가? 실제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없다와 있다의 반복 속에 우리의 신앙적 감정과 육적 감정이 교차된다는 것을 경험한다. 같은 없다인데, 하박국과 다윗은 위치를 바꿈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는 어감을 달리하고 있다. 

하박국의 표현을 먼저 보자. 육적인 것들이 없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6회나 사용하면서 우리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런데 그렇게 없는 상황인데도 마음은 오히려 그 상황과 전혀 반대인 기쁨의 상태를 말하면서, 기쁨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 있다. 우리의 공통적인 기쁨의 조건들이 무엇인가? 무화과,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에 먹을 것, , 소다. 하박국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언급함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다. 

이제 다윗의 표편을 보자. 먼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먼저 이야기한다. 여호와와 자신의 관계를 먼저 확신한다. 보편적으로 우리의 육의 결핍은 영적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영적 결핍이다. 그래서 고후 4:16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했다.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 돌아가기로 결심함(6)  비록 남편을 따라 모압 땅으로 가긴 했지만 고향 베들레헴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오미는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성경기자는 인간의 역사를 누가 친히 이끌어 가시는지를 말해준다. 양식을 주시는 분을 여호와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근도 하나님께의 섭리아래 있는 것이다.  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성경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 아니라 그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이신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성경이 에스더입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 , 여호와와 같은 단어가 한 단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살리고 사악한 하만의 계략을 만천하에 알리시는 것을 봅니다. 에스더서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역사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문제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소중하다. 그래서 역사를 HIS + story라고 하는 것이다. The center of it is Christ Jesus, the ruler of it is God. 

오늘 본문에는  가지 결단이 나옵니다. 하나의 결단은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이고,  다른 결단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어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단은  집안을 무너지게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단은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결단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돌아섰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약속의 땅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한 인간이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한 시점입니다. 마치 탕자가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15:19)”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간은 육의 양식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혼의 양식이 있어야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인간에게 있어서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양식과 신앙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것 같다.

[2]  자부를 돌려 보내려고 설득함 (7-18)  처음에는  사람 모두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 보내고자 했습니다. 만약 나오미가 완전히 회복되고 신앙이 굳게  있었더라면 자부들을 돌려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축복이 보장된 약속의 땅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돌려 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자부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13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하나님의 실패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부들에게 하나님 만을 붙들고 함께 돌아가자는 말을 자신있게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그녀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던 입니다. 이처럼 회복되지 못한 불신앙은 자신 아니라, 주님을 찾고자 하는 이들, 신앙의 결단을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나오미가  번에 걸쳐 자부들을 설득하자 오르바는 떠나고 룻은 그녀를 붙쫓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그녀를 떠난오르바를 행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15절에  동서가  백성과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말합니다. 아마나오미 생각에 자부들이 모압으로 돌아간다면  땅의 신인 그모스 섬기게  것을 염두해 두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나오미는 오르바가 이방신을 섬기게  것을 뻔히 알면서 보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따라 가려고 하는 룻까지도그렇게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  멀어지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8절에는 Go, return, each of you to her mothers house& 12절에서는 Turn back, my daughters; go your way 오늘 본문 이후 오르바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과 관계,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 마지막이  수도 있습니다. 좀더 깊이 나오미의 심경과 의도를 살펴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가 고향 친구들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같습니다. 진정으로 며느리를 사랑한다면 이방신에 찌들려 있는 그들을  신이신 하나님께로 오히려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3] 소망의이 혹시 있더라도..--> 한걸음 나아가, 나오미는12절에 혹시 내게 소망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소망이 더 이상 없다고 논리적으로 설득합니다. 틀린 분석이 아닙니다. 마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보고한 10명과 같이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보면, 믿음이 없은 경우에는 대부분, , 미래에 대한 판단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게 있는 자원을 가지고 나의 미래를, 비전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14:23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죄니라” 믿음은 현실에서 우리 밖에 초월해 계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 안에서 영혼의 자유를 누립니다. 

소망은 우리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소망은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오르바의 소망의 근거를 비교해 보라. 룻이 어머니를 따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때문이다. Your God will be my God에서 우리는 룻이 어디에 최종적 소망을 두었는지를 짐직할 수 있다. 

나오미는 계속적으로 나는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소망이 없으나 나의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다고요. 절대의존감정 & 상대적 의존감정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절대의존감정이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의존할때 나타나는 감정을 절대의존감정이라합니다. 반면, 이 아이가 장성하면 자신의 것과 비교하여, 다른 아버지와 비교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의존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대적 의존감정이라 합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신과 비교해서 보고 나서 믿을 만 하면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신앙의 모습을 싫어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학문이 무엇일까요? ‘비교종교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십니다. 

Hope, in its general sense, is the anticipation of a future outcome. It is a subjective expectation which may be either firmly based(1)or misdirected(2).

(1)   Firmly based one :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2)   Misdirected one : 

 33: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23:16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46:3-4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우리가 소망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소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입니다. The real outcome of Hope in us will come from the words of God and in HIM. We have to put the hope not on the subjective base but the objective one, the Word of God.

[4] 진정한 배려와 은혜  나오미 며느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배려와 은혜가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나오미는 인간적인 배려의 측면만을 보입니다. 영적 도전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르바는 이방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룻도 그럴뻔 했지만 그녀의 결단으로 인해 나오미의 곁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육적 축복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의 배려를 참으로 훌륭한 시어머니의 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느리를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녀가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축복은 며느리에게 육신의 남편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육적 남편만이 아닌, 영적 남편인 진짜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을 줄 때, 이 수준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올바른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에게 영적인 유산을 많이 남겨줍니다. 기도하는 법, 믿음의 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따르는 법…등 말입니다. 

나오미의 인간적인 사랑 역시 훌륭하지만, 그녀는 오르바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사랑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방해하는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어른으로서 은혜의 자리에 올바르게 있지 않으면, 이처럼 나도 모르게 신앙의 방해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최선의 배려이고 은혜이며, 사랑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최고의 방해꾼이라 이 말입니다. 

이제 카메라는 룻의 고백으로 옮겨집니다. 룻이 계속해서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 땅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오미가 오르바에게 돌아가라 조언할 때, 네 백성과 네 신들이라고 했었던 것을 기억해 보면 룻의 고백은 이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맹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 자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죽음과 무덤까지 인용해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고백은 이스라엘이 해야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나오미가 자부들에게 네 백성과 네신에게 돌아가라고 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럴 때, 나오미가 어떻게 답을 해야하겠는가? 룻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오미의 영적 상태가 시들시들 비실비실 하니, 하나님께서 룻의 입술을 빌려 말하시는 것이다. 당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을 깨우치신 것처럼 말이다. 

생명걸고 믿겠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고. 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신자는 흉년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4장에 가인의 족보를 시작하면서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고 시작하고, 믿음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 셋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삶입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슈브~~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14:4 애굽으로 돌아가자 You?

[5] How can we turn to God  By repentance from sins. Repentance involves turning from sin  1) Sorrow for sin 2) Confession of sin 3) Forsaking specific sins 4) Making appropriate restitution and Making a decision based on the Word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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