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세상 무엇으로 살 것인가 ( 4:35-41)

 

 

미국 경제 대공황 때, 유명한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그는 경제 위기나 정치 위기보다도 심리적 공황이 더 위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를 겪어 가고 있는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 익명의 공포, 미지의 공포, 조지아에 있었던 최근 한인을 상대로 한 총기사건 소식을 통해 또다른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상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 시리즈 를 만들었습니다.  

 

공포의 대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무섭 나(I).’ 무서워 유(you) 는 네가 내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서운 걸 (girl)’ 이라고 부릅니다. 또 여자들은 남자들이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무섭 군(boy)’ 이라고 합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하도 살맛이 나지 않으니까 생의 무력증에 시달린 나머지,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사는 것이 너무 공포스러운 나머지 무섭 데이 (day)’라고 합니다. 예전에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나, 플로리다나 택사스 홍수를 보면서, 큰 걱정이 바로 비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무섭지 비(rain)’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모든 것이 무서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섭다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무섭 다(all)’랍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들이 겪고 있는 풍랑(코로나)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 극복하고 꿈에도 기다리던 호수 저편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읽어 나가는 중에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힙니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뱃전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계속 주무시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잠을 청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제지들이 어떻게 이 파도에 반응하는가를 보시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사건이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을 통해 제자들을 테스트하신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하셨을까요? 인생의 바다에는 풍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가 지나면 또 다른 것이 닥칩니다. 인생의 풍랑은 전혀 예고 없이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많은 풍랑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때에 갑자기 들이 닥쳐서 상처를 입히고 서는 홀연히 떠나갑니다. 갈릴리의 풍랑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저는 갈릴리 바다야 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풍랑을 만납니다. 그래서 더 당황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풍랑은 인생에 쉴새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준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풍랑이 면제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풍랑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풍랑을 맞더라도 뚫고 나 갈수가 있다,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을 원어 성경에서 보면 여러 가지 색깔 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형형 색색의 시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대비하라고 말씀하 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약 불 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우리에게는 평범한 시험도 있지만, 불 같은 시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갈릴리 바다의 풍랑은 큰 광풍 이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라는 형용사로 메갈레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메가톤급 풍랑이라는 뜻입니다. 거대한 풍랑, 삶의 근본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풍랑, 내 삶의 존재를 위협할 수 있는 정도의 거센 풍랑이 제자들을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이 풍랑만 헤쳐 나갈 수 있다면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풍랑을 허용한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이 바다를 지나 꿈의 언덕에 도착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합니다.

 

한 걸을 더 나아가서, 풍랑을 넘어 저 바다 건너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잠에서 깨어 나셔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 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주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능력이 있습니다. 바다는 언제 폭풍이 몰아쳤었냐는 듯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고고요 해졌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님은 두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너희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리고 또 하나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어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 선 것은 그분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다, 구세주이다, 저분을 따라가면 인생이 변한다, 우리 인생이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는 이 현장 속에서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어느 한 순간, 인생의 어느 특수한 상황에서는 전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잠들어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과 무관심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나의 이런 상황에는 무심하시구나.’ 하늘도 무심하다.’ ‘하나님도 나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적용시키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삶에 적용시키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믿음을 적용시키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는 신자도 많지만, 시도 조차 안하는 신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자는 척하시면서 제지들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사건 때도 그랬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도 믿음을 가진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믿음을 제대로 가지려면 환경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섰을 때 제자들의 믿음은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려운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때 우리는 위축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럴 때는 보려고만 하지 말고 들으려고 하십시오. 

 

뭘 들어야 합니까?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고통의 현장, 낙심과 불안의 현장, 시련과 역경의 현장 속에서도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고요히 말씀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아니한가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음성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고 성장시키는 원천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렘 33:2-3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로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언제 들리냐면요.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33: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시니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 복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멀리하면서 신앙 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풍랑을 만난 때야말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볼 시간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성경을 통해 주께서 지금 이 순간,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풍랑의 바다를 건너갈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가 이 풍랑의 바다를 건너 저 바다 건너편에 도달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확신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서는, 예수님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꾸짖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표현입니다. 본래 꾸짖는다’(rebuke)는 단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야단치실 때 사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람을 꾸짖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풍랑의 배후에는 어쩌면 악한 세력 , 사탄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인 항변하다는 단어가 같은 ‘rebuke’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고통이 악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고통은 사탄 때문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낙망시키고, 주저앉게 만드는 일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꾸짖 어야 합니다. “파도야 잠잠하라. 고통아 사라져라. 문제야 극복될지어다.”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 나가면 고통의 상황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신앙 생활의 초기에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이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 신앙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우리는 이런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신앙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되고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 이라는 질문에서 누구 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 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진정한 확신과 고백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분은 누굴까? 바람과 파도도 복종하는 저 분은 누굴까? 제자들은 어느새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았을 까요? 바람을 잠잠케 하신 저분은 바람을 지으신 분이 아닐까? 파도를 잠잠케 하는 저분은 파도를 지으신 분이 아닐까? 한 순간 그들은, 인간 예수로부터 놀랍게도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아무도 이 고백을 넘어서지 못하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창조자일 뿐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섭리자이십니다. 그리고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는 분이시며 인간 내면의 풍랑도 잠재울 수 있는 분, 나를 참된 평화로 인도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 예수를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제자들은 한 순간 예수가 창조자이자 승리자이시며, 통치자이자 구원자이시라는 놀라운 발견 앞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1절에는,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무서워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쓰인 무서워하다 41 절의 두려워하다 와 다릅니다. 헬라어 원문과 가장 가깝다는 영어성경 ESV을 보면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차(filled with awe/fear) .” 여기서 awe’ 라는 단어는 우리말의  !’ 와 비슷합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한 순간 그들은 놀라운 경이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인간으로만 생각하다가 그분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 ,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분!’ 한 순간의 깨달음에 그들의 인생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해왔는데, 바로 그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니 ! 그러자 모든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무리 풍랑이 들이 닥친다 해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풍랑이 문제겠습니까? 

 

행복은 무엇입니까? 참된 안정은 무엇입니까? 풍랑이 없는 것이 안전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참된 안정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풍랑의 시기를 지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코로나를 지나가는 것이 정말 힘이 듭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온 세계가 고통 가운데 있게 될 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방 지나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힘든 시간 가운데 있다 할 지라도, 중요한 사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맨 처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고'' (35). 그 항해를 제안하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에게 계획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너가자고 제 안한 분이 그분이시니 바다를 건널 계획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풍랑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제외된 것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사업장의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운 세상 무엇으로 살아야 할 까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 23 - 경상도 버젼

 

여호와가 내 목자아이가! 내사 마 답답할끼 없데이 -퍼런 풀구딩이에 내 디비지고 저 쓴한 또랑까로 낼로 이끄신데이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아라카심은 다 저그 체면 때문이라카네 내 죽을뻔한 골짜구디 껌껌한 데서도 간띠가 부어 댕길 수 있음은 그 빽이 참말로 여간 아이라! 주의몽디-와 짝대기가 낼로 지키시고 내 라이벌 죽일 놈 문-디 앞에서 낼로 팔팔 키워주시네 내 인생이 아무리 복잡다 캐싸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끼니까 내사 우짜든가 그 옆에 딱 붙터갓고 죽어도 안떠날란다!.........

 

시편 23 - 전라도 버젼

 

아따!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그분이 나를 저 푸러브른 초장으로 뉘어불고 내뻐친 다리 쪼매 쉬어불게 할라고 물가시로 인도해뿌네!(어쩨스까! 징한 거......) 내 영혼을 겁나게 끌어 땡겨불고그 분의 이름을 위할라고 올바러븐 길가스로 인도해부네(아따 좋은그....)나가 산꼬랑가 끔찍한 곳에 있어도 겁나불지 않은 것은 주의 몽뎅이랑 짝데기가 쪼매만한 일에도나를 지켜준다 이거여! 아따!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가 사는 동안 그 분의 착하심과 넓어브른 맴씨가 나를 징하게 따라당깅께로 나가 어찌 그 분의 댁에서 묵고 자고 안하겄냐.... (아따 좋은그......)

 

시편 23-충청도 버전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 그 분이 지를 무지무지 파란 풀밭에 어푸러지게 하시며 니나노하기 딱좋은 둠벙 가생이로 인도하여 주셔유. 지 영혼을 살려주시구유,,,,,, 그분의 함짜를 위하여 의의 질루 인도하시는 것이지유....... 지가죽어 나자빠질도 모를 깡깜하고 칙칙한 골짜구니로 댕겨두 해꼬지를 무서않는 것은 주님께서 지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지유......... 하마 주님의 지팽이와 막대기가 지를 지켜주시네유..........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지 평생동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참말루 지를 따라 댕길모양이니 지가 여호와의 집에 아예 푹 눌러 살것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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