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니 드러나는 것들 ( 11:1-11)

 

 

오늘도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스가랴 9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 주일'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 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 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한 주간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행적을 따라 가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2절에 예수님께서 맹인 바디메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오늘 종려 주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하기 전에 맹인 바디메오의 눈을 열어 주시고 입성하십니다. 그들은 무엇을 못 보고 있었는지, 우리의 눈은 열렸는지? 생각하며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1.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신앙고백 없이 길에 서 있는 자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있으신지요? 이번 한 주간에 그것을 먼저 확인 했으면 합니다.  8: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도 신경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따르는 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크레도(Credo), 나의 심장을 드리다, 나는 믿는다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이다. 아멘라는 이 고백에 우리의 심장을 드리는 것이니다.

 

2. 길에서 누가 더 크냐?  토론하는 제자들

 9: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도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 길에서 영생의 방법을 확인  자신의 공로를 예수에게 자랑하면서 길에 서 있는 자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의 원천이신 예수를 옆에 놓고, 다른 것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거져 받는데, 우리 인간은 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면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1-22,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면 재물이 적은 우리들은? 구원의 조건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4. 죽음과 부활의 길을 말씀하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이 길에 서 있는 자

 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 가노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나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간구  자신의 소원에만 관심을 가지고 길에 서 있는 자

 10:35-36,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어머니와 그 아들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20:24절을 읽어 드립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우리는 다른가요? 예수님의 길과 제자들의 길이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늘 우리의 마음 속에 다른 소망을 가지고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려 주일을 통하여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6. 호산나 호산나  종교적 열정만 보이는 자들아..

예수님은 여리고를 떠나 드디어 예루살렘 근교에 도달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이상한 심부름을 시킵니다. 맞은 편 마을에 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볼 텐데 그것을 풀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라고 답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마가는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 사건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가 뿐 아니라 마태, 누가 그리고 요한까지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실 지금 스가랴 9:9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사실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워온 유대인들에게 아주 생경한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그냥 길가에 묶여 있는 새끼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는 심부름만 시키십니다. 그 심부름을 수행하면서 오가는 길에 그 뜻을 스스로 생각하게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여 스스로 스가랴의 예언을 생각해내어 메시아에 대한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자들은 이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에 의하면 그들이 스가랴 말씀에 비추어 예수님의 심부름과 행동의 진의를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입으신 다음이었습니다.  12:15-16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신앙 생활하다가, 성경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는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훗날 그 일이 해석이 될 때가 있지 않으셨나요? 그것이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니 당장 성경이 해석이 안된다고 조급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다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 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7.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이여 

무리들은 예수님의 앞뒤를 호위하고 따라가며 열광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겉옷과 들에서 꺾어 온 잎 많은 생나무 가지를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9-10):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란 말은 '우리가 비오니 우리를 구하소서'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를 통해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예수님과 그를 통해 임할 나라를 축복하면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구원해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으로 다윗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 예수님을 떠나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 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모습과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마가는 아무런 논평 없이 이들의 열광적인 모습과 무대에서의 사라짐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은 언제든지 사라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금은 비록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지만 조만간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헤롯의 꼭두각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빌라도 총독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을 열망했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우리들의 기대는 현재 다르다고 고백할 수 있으신지요?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실망하고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열심이 다 식은 것입니다. 고난 주간 기도회를 통해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끈질긴 욕망과 과감히 결별해야 합니다. 이번 한주간, 주님께서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셔서. 욕망을 버리고, 예수님,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경건하게 포장된 욕망까지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종려 주일, 고난 주간, 내가 왜 예수를 열광하는지? 혹은 왜 예수에 대해서 그토록 반감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2절에 예수님께서 맹인 바디메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눈이 열리는 ‘에베다’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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