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 13:1-8)

 

 

ISIS 테러, 김영삼 전대통령 서거, 한국야구 승리, 서울 송파구에 있는 롯데 월드 타워가 내년 말에 완공되면 555미터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된다고 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입니다. 세계 4위의 건물, 63빌딩[249]만 봐도 너무 높아 현기증이 느껴지는데 이것보다 두배 이상 높은 롯데 월드 타워는 어떨지 상상이 안 갑니다.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할 겁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고대로부터 거대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강화해 보려고 했습니다. 바벨탑의 연속입니다. 부르즈 할리파 두바이 아랍에미리트         828m/상하이 타워 상하이 중국632m/알베이트 타워  메카 사우디아라비아601m /롯데월드타워 서울 555 / 1 세계 무역 센터 뉴욕 미국541.3m /타이베이  101타이베이509m 

예루살렘에도 유명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것입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이 지었습니다. 그 성전은 BC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BC 536년 스룹바벨에 의해서 성전이 재건축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원전 63-62년에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헤롯 성전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입니다. 이 헤롯 성전도 AD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서 지금은 성전에 딸린 성벽만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성전에 들르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3:1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렀다가 나오는 중에 제자 하나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이 헤롯 성전에 자부심과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십니다. 

이 짤막한 대화가 있은 뒤에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한 감람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어날 것이며,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4).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가 곧 세상의 마지막이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당시 헤롯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세상 종말이 오지 않는 한 그것이 파괴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이런 생각을 종말론적 사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종말론적 사상은 BC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당연히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왕족과 귀족들은 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인해서 기존의 모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까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벨론의 신보다 떨어진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백성과 의로운 사람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 고난과 재난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나라의 본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 운명에 대한 두 가지 통찰이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죽은 다음에 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저 세상에 대한 생각 없이 살아있는 동안에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한 참혹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 땅에서의 죽음이 저 세상에서 보상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국 파멸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자신들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와야만 이 세상의 기존 질서가 해체되고 악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를 경험한 다니엘은 역사의 방향과 그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이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을 두어야 할 나라는 어디인지를 예언했던 것입니다. 

 12:1-4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니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5:24-28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 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바르신은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다 하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종말론적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아주 정확하게 뚫어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종말론적 현상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죽고 더 많은 이들이 중상을 입은 사건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우주의 캐이아스[혼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태양계를 떠돌아다니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지름 1km 혜성과 충돌하면 지구의 용암이 분출되고 화산재로 뒤덮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생명체는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학자들은 지구에 빙하기가 올 것이라 예측합니다. 먼저는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그 후에 지구의 적도 부근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다 얼음으로 뒤덮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거기서 살아남기 힘듭니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빌리면, 우리는 지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 속에 들어 있는 개구리처럼 살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런 파멸을 피해보려고 우주 물리학자들은 지구와 닮은 행성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NASA 39광년 거리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소망이 생기시나요? 1광년은 빛이 초속30km의 속도로 1년동안 나아가는 거리로 9 4670 7782km입니다. 그런 행성에서 먼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낮의 기온이 3백도이고 밤의 기온이 영하 2백도라고 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생태 환경이 지구와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거기까지 이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초속 30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타도 39년이 걸리는 거리를 인간이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우주 가운데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그 지구에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인간은 누구이며, 우리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너무 아득한 질문이라서 일상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것을 현실로 느끼기 힘들고, 또 느끼다보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엄정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외면한다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토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으며,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성경 말씀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볼까요? 지난 일년 동안, 아니 나의 나이만큼 왜 살았던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보스턴에서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종말론적 선언은 한 개인의 실존적인 삶에서도 분명하게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헤롯 성전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겉으로 볼 때 화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제가 열거하지 않더라고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지난 세월 영혼을 쏟아 온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분들은 없을 겁니다. 헤롯이 정치적으로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막대한 재정을 들여서 그 성전을 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려 46년동안 그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거의 평생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들은 머지않아 모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상태로 떨어집니다. 

때가 오면 죽음이라는 개인의 종말을 맞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이런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면서 사는데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주 오래전에 유스아이에게,‘너의 인생 목표가 뭐니?’ 하고 물으니, ‘죽음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모두 종말로 묘사될 수 있는 죽음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목표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목표가 정해지면 그리 향해서 간다는 측면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은 허무주의나 비관주의, 또는 거꾸로 쾌락주의에 빠져서 살자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세상에서의 삶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지나가고 뿌리 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뚫어보는 사람은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소중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삶을 소비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 썩어질 것, 허망한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구원 이후에 이 땅에 우리를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사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언제 이런 일이 있겠냐?’ 한 제자들의 질문, 즉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종말의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8절을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여러분들의 삶에서 정말로 소중하고 중요한 질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기억하십시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느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초창기부터 그들의 영혼을 불살랐던 주제였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우리의 영생을 경험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 세상에서 그 하나님 나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대신 주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흔적들만 보입니다. 그런 일들이 다행하게 자신 혹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겉으로는 밝은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블랙홀과 같습니다. 

비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바로 앞에 일어날지를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더구나 완전한 어둠인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예배를 함께 드리는 우리가 오늘을 끝으로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지낼까요? 세상을 갈수록 1초 앞을 모르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보스턴에서, 프랑스에서, 말리에서, ...등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있게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텨 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여러분 이 세대의 큰 건물들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이 마음에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이라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그 길을 가시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는 질문을 왜 하셨을까요?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 왜 복되다고 하신 것일까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그런 고백이 터져 나오고 계시는지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4:35)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죽음을 경험하시고 부활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최대의 감사제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늘의 삶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아멘! 그것이 우리가 오늘 기뻐하고 감사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단순한 한해 동안 먹을 거리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사건사고 현장소식을 듣고 보면서, 우리의 영혼을 이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오늘 이시간 물어야 할 질문? 내가 주님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진정으로 터져 나오는 감사의 제목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건물과 업적 때문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