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관심 (마가복음 2:13-17)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0을 보면,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십니다. 그 이후, 오늘 말씀은 세리 레위를 부르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곧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신 그 의미를 좀 더 확장시켜 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기적을 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1:15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9:9절에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은 마태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 가셔서 같이 앉아 식사를 하셨습니다. 레위만이 아니라 레위가 초청한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16절에 보면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핵심은 함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저하시키는 행위였으며, 불경건한 태도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을 때 레위는 즉시 일어나 좇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레위가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사실을 볼 때 레위가 이미 소문을 통해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예수님 안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삶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통하여 자기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생겨났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동안 살아오던 삶에 대한 바른 인식과 뉘우침이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과 번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바로 받아 들이는 선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레위는 본명입니다. ‘마태는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그분으로부터 받은 또 다른 이름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12제자의 이름을 언급할 때 마가는 레위라는 본명으로 기록하지 않고 마태로 기록합니다.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이는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는 주로 마태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만히 보면, 길을 잘못 들기도 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 길에서, 어떠한 자리에 무엇을 해 보겠노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중요한 일인 것같이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를 악물고 세금을 거두면서 로마에 충성하고,  집에 돌아와 보면 허탈함을 감출 길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생을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에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한 인생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마태를, 아니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안개와 같은 인생을 불러 내어 주셔서 하나님 나라,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불러 내셔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결국은 고귀하고 아름답게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마태의 장점을 사용하셔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성경, 마태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 마가도 마찬가지이고요. (얼마나 비겁했던 사람이었습니까?)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 썩지 아니합니다. 마태의 자리가 돈이 잘 벌리고 평안하고 말썽이 없으며, 비록 남들에게 비난은 받을지언정 그대로 잘 유지하면서 살아갈 자리라고 해서 거기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면 그는 썩고 말았을 것입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상이라는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의 욕망들의 산물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야 썩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마태는 자기 뿐 만 아니라 자기의 동료들도 주님께 소개하고 싶어서 집에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 잔치를 할 때 와서 예수님을 만나라, 참으로 살 길은 여기에 있다!” 하면서 세리나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많이 불러 왔습니다. 그 당시는 세리를 죄인과 함께 묶어 가지고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의인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입니다.  3: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3: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에 의인은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진정한 의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예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시비를 거는 자들에 대해서 너희들이 진짜 죄인이라는 점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의인과 죄인을 대조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오해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진짜 병든 자요, 누가 진짜 죄인인지를 꼬집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율법적 열심은 자기들을 의롭게 해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없었던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양심으로 사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14-15절 말씀을 종종 인용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인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양심이라는 것으로 서로 송사도 하고 변명도 하고 율법의 기능을 충실하게 합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선악 판단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하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의 판단을 스스로 하면서부터 인간 속에 생긴 도덕과 윤리의 판단 기능이라고 우리는 합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선한 양심도 있고 악한 양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으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신문을 보는데 너무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요즘 지진 소식과 수해 소식이 많이 들립니다. 오늘 우리는 선교 기금 마련 펀드 레이징을 합니다) 아무튼, 그걸 보는 순간 양심이라는 것이 소리를 칩니다.(칠 것입니다) ‘도와 줘, 그런 착한 일이야, 그러니까 네 것을 털어서 도와 줘 바로 이런 소리가 우리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양심이며, 그 양심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면, 양심의 송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양심의 송사에 온전히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 자체가 본능적으로 이기적 자기애에서 출발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주기는 줍니다. 자기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가책을 받지 않을 정도의 한도 내에서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는 곧 변명을 합니다. ‘내가 내 소유를 다 털어서 저 사람을 돕게 되면 난 완전히 파산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니까. 요 정도만 도와 주자. 그래도 이게 어디야?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나은 사람이잖아 

 

그리고는 그러한 일을 한 자신에게 박수와 찬양을 보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재판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자기 안에서 송사와 변명과 재판이 다 일어나지요? 그게 타락한 죄인들의 선악 판단이며 그게 바로 화인 맞은 양심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양심을 발휘하여 약간의 선행을 해 놓고는 자신이 해야할 일 전체를 그것으로 교묘하게 가려 버리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한 인간들의 위장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에 모두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14-15절 다음 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드러낼 것이라 

 

그러니까 인간이 양심을 따라 열심히 살면 착한 사람이 되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을 따라 열심히 살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구원도 어렵지만, 양심에 따라 삶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경험해 본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입니다. 그래서 롬 3:23은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모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자신들은 선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 그리고 율법을 받지 못했으니 양심으로 선하게 살고 있으니 선하다고 자랑하는 이방인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모두는 자신이 인정하든 안하든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2: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에 비해서 자신들은 건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양심 대로 살았어. 나는 착한 사람이야. (솔직히 드려다 보면 자신이 정한 양심의 기준이기도 하지만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과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가 병든 자요,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통회하고 회개하는 죄인을 불러 의인 삼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복음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만큼은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영광까지 허락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죄인들을 의인으로 삼아 주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한 식사에 참여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레위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마태라 불렀습니다. 그는 그 은혜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이름을 마태라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의 죄의 짐입니다. 예수께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세요.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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