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삶 (빌 1:19-30)

 

 

빌립보서 전체가 다 귀중한 말씀이지만 특히 본문 21절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 간증입니다. 또한 신앙적인 인생 철학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절)."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 이순신 장군의 명언)

 

이것은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어서 유익하다면 죽는 것도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삶에 우선 순위가 생겨납니다. 삶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생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생의 출발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잡아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은혜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참된 생은 다메섹에서 시작된 것이지 길리기아 다소에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제자로, 전파하는 자로, 그렇게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은 그렇게 사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오래 그리워하던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찬송가 162장 가사에도 있듯이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하다가 몸도 마음도 단장하고 예수님 앞에 다가서는 그런 모습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사람을 보나 하나님을 대하나 자연을 보나 부끄러움이없고 담대합니다. 그래서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구체적인 생활을 뜻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 이 구체적인 모든 현실적인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생활이가끔 있어 문제입니다. 예수께 욕이 돌아가든 말든 내가 존귀하게 되어야겠다는 생각, 내 이름이 손해보면 안 되겠다는 이런 생각이 항상 문제입니다. 나야 어찌되었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높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다시 한번 21절의 말씀을 깊이 생각합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아, 하루만이라도 더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마지막 이 어두움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

 

이 죽음의 문제와 죄의 문제가 함께 엉켜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죄 문제를 고민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과 죄, 이 두 가지를 떼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정말로 깨끗하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의 해결이 없이는 어떤 일로도 그에게 기쁨이 없습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돈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면 행복합니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 맨 밑바닥에 깔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 두 가지 걱정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복음을 받은 자입니다.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자를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혹은 약속의 선민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이로 인하여 권능을 얻은 사람들은 이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27절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폴리튜에스데 '행하라'는 말입니다. 그 어원은 폴리테 이고, 폴리테스는 '정치'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헬라어로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폴리튜에스데'는 시민으로서 행할 바를 행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의 시민이 되면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누림과 동시에 의무와책임도 져야 합니다.

 

이것을 좀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빌립보라는 도시는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인지라 로마 시민은 당시 큰 특권을 가졌습니다. 역사가들의 말로는 로마 시민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일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권 하나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특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 시민들이 식민지에 가서 살 때에 문제가있었습니다. 식민지에 들어가 살게 되면 로마 시민으로서의 우월감이 더욱 대단했습니다. 어디 가나 로마 시민의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자기나라 풍습과 체통을 지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 시민은 배가 고파도 결코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까지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알아듣든 못알아듣든 꼭 라틴말만 썼습니다. 로마 사람의 옷을 입고 로마 사람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 사람들은 불편하든 말든 항상 로마식 이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말, 자기 옷, 자기 풍속, 자기 이름을 지키면서 로마인답게 살았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도 이런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어디서 살든 꼭 자기들의 풍속, 언어, 의상을 고수하면서 삽니다. 추우나 더우나 항상 목까지 올라오는 까만 옷, 까만 모자를 쓰고, 아이들은 머리를 길게 땋고 다닙니다. 이러한 복장으로 회당에도 가고 일도 합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므로 직장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아예 직장을 그만 두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답게, 로마인은 로마인답게 사는 것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은 어디에서 살더라도 천국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행위언어풍속을 가지고, 자기 주체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럭저럭 타협하고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아닙니다. 오리는 물에 떠 있으나 물에 젖지 않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세속에 살지만거기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출발을 다시 상기해 보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귀신들린 아이 고쳐 준 것 때문에 문제가 되어 애매하게 감옥에 갇혀 매를 맞았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고도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당할 때는 억울했으나 감사 찬송을 하자 옥문이 열렸고 간수가 회개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바울에게는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 이렇게 역전승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본 편지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빌립보에서 당한 것을 너희는 보지 않았느냐, 대적이 있으면 오히려 잘되는 것이다. 복음의 역사는 성공할 것이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요 저들에게는 멸망의 증거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어도 이만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내 삶을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성도를 도우실 때 사용하시는 2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간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약속에 따라, 우리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고, 부르신 자를 영화롭게 할 때까지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성령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들의 간구로 인해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골 4:3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이와 같은 기도의 결실이 맺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를 둘러싸던 시위대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실제로 이뤄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 2:3절 이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성도들의 기도와 합심)

 

(그 결과) 막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노라 하더라”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가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고 성령의 역사를 믿는 것이 담력의 근거가 됩니다.

항상 나만 감동시키는 하나님이 아니요 원수의 마음도 감동시키고 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성도들이 기도와 함께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높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좋으면 나가게 하시고 죽는 것이 좋으면 죽게 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 '내가 사형 선고를 받은 줄알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때로서는 '하나님께서 나더러 감옥에서 죽으라시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 일을 너무 걱정합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TV를 볼때마다 "아이구 이것 큰일났구나"하고 놀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위탁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또 나를 위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되어지는 일들은 모두 기도의 응답이니 너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좀더 나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닫힌 문을 열어 주기도 하시고 잘못된 길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 멀리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시 잘못된 자녀가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기도가 함께 해서 반드시 주님의 뜻이 선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사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뜻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이 잠깐 잘못되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지금 내가 참예하고 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담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환경만 보고 실망하지 맙시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을 받은 자답게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 냅시다. 그럴 때, 그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할 것입니다.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할렐루야 

 

복음으로 천국 시만답게 삽시다. ~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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