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권능( 3:7~12)

 

 

 사람으로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죽이면 그만이다." 소위 완전 범죄를 꿈꾸며 죽여서 문제의 해결을 보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그런가하면 나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또한 무서운 사람입니다. 

죽음이 끝인 것처럼,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 32절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 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생의 철학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내일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나 철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장 오늘 이 한 시간의 생활자세도 바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원수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또 하나는 물질주의입니다. 

예술, 철학, 사상 등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만 다 묶어보면 허무주의입니다. 소위 유식하다는 사람들의 철학이 하나 같이 허무주위입니다. 맹랑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렵게 오랫동안 한 공부의 결론이 허무주의로 끝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그것밖에 더 생각할 수가 없나 봅니다. 

또 하나는 물질주의입니다. 우리가 몸서리치게 생각하는 공산당이 유물주의 아닙니까? 유물주의 사상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공산당은 물질이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자들입니다. 모든 가치관은 그의 인생관에서 유래되고 인생관은 그의 내세관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세관은 부활 신앙 위에 있습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서도 부활 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수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젖은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로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위에서 부활 신앙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겁에 벌벌 떨던 베드로였지만 부활 진리를 믿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증언을 합니다.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3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2:36).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3).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능력이며 권능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십자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분명히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 죽음 뒤에 부활사건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창조는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창조입니다. 이것이 더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죽음이요,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계시된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담긴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위하여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사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계시가 바로 이 십자가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죽지 않으실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피할 길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들어오시지만 안 했어도, 만약에 빌라도 목전에서 한 마디만 잘 말씀하셨어도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납득되지 않아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데 왜 말이 없느냐"고 답답해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자발적이요, 자원적인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모르는 자로,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자원적인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득이하여 죽는 죽음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십자가입니다. 죽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선택적인 죽음이 십자가란 말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수록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지식과 모든 노력과 모든 희생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지난날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더 알지 아니하기로 했습니다(고전 2). 지식에서까지 십자가만 알기로 결단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척 알려고 했습니다. 안다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왜 십자가 사건이 있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자 했고 일생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는 이제 깨닫습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나타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좀더 알기 위해서 고난에 참여하려 합니다. 같은 경험에 들어가기 전에는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고난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가득 채우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귀한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은 아주 귀한 말입니다.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그는 날마다 죽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처럼 죽으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본 것처럼 그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습니까? 오래 살아야 하고, 편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며, 십자가가 없어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어리석은 말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밑에서 소리지르며 "뛰어내려라, 그러면 우리가 믿을 것이다"라는 외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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