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삶 ( 14:7-9)

 

 

신앙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를 우리는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 기억을 떠올려서 첫번째는, 영적 분별력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세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삼손이 그 여자를 기뻐하였다는 말씀은 그녀의 외모와 행동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 여자가 삼손에게 매력적인 여자였음에는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야 할 사명자의 아내를 선택하는 기준이 인간적인 안목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영적인 안목을 보지 못하고 외모에 흠뻑 빠져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자신의 며느리를 고르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앙적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지켜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그에게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예]

노아의 시대가 죄악이 관영한 시대였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타락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노아 시대 시작부분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부분을 놓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나 문맥을 살펴보면, 쉽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5장의 셋 계열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딸들이란 4장의 가인계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의 계열이 무엇을 대표하고 있습니까? 아론의 계보를 따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앗을 뿌려 놓은 자손들입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계열은 어떻습니까? 세속주의에 물든 이들을 표상이 되었습니다. 전자가 헤브라이즘을 숭상했다면, 후자는 헬레니즘을 따르는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전자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 후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창세기 6장에 들어서면서, 통혼을 통해 이 두 그룹의 구분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신앙인과 비 신앙인과의 경계선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을 자세히 보세요.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신자와 비신자와 다른 점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신자세요? 그래서 비신자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으세요? 다른점은 고사하고 예수 믿고 달라진 점은 있으십니까? 

경계선이 있습니까?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은 엄연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피값주고 세우신 교회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조직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우리 교회 안을 들여다 보세요. 무엇이 세상과 다릅니까? 

찬양하는 것입니까? 예배하는 것입니까? 봉사하는 것입니까? 전도하는 것입니까? 선교하는 것입니까? 순모임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것입니까? 정직한 것입니까? 겸손한 것입니까? 설교를 듣는 것입니까? 

말씀해 보세요. 어느 부분이 다릅니까?  24:15을 보세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21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곳은 어디입니까? 

이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말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상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삼손이 지금 그런 위험의 길 즉 창 6:2절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함께 비전을 나누고, 함께 열정을 품고,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사명을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단지 외적인 아름다움과 조건만을 결혼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자녀들 중에는 하나님이 주신 짝인지, 고난 가운데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인지, 함께 비전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 기도해 보지 않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결혼을 하려면 외적인 조건도 따져야 되겠지만, 영적 상태와 같은 내적인 조건도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순간 순간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말씀으로 승리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보이는 대로 결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19: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발의 등이고, 길의 빛이십니까? 이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고는 이론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반드시 밟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무 곳이나 밟으면 안되는 것이죠?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그냥 가는 것 같지만, 항로가 있습니다. 바다에 떠다니는 배도 길따라 갑니다. 바로 해로따라 가는 것이죠. 육지에는 육로가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모든 것이 그냥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제마다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도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도리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 119:105절의 말씀을 보면, 이 발과 길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 등과 빛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왜 등과 빛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발이 밟아야 할 곳과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미래를 보고 가세요. 한치 앞도 모른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고 우리네 인생의 선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이 중에 한치앞을 아시는 분이 있으세요? 한치는 약 2.54cm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국민학교 다닐 때, 전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과 설명이 있는 최고의 학습가이드였습니다. 전과 하나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전과를 집안이 가난해서 사 보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빌려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필요하니까 친구에게라도 빌려서 봐야 했던 것이죠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이런 역할을 해준 다는 것입니다. 뒤에 내 길의 이라고 쓰인 단어는 히브리어로 rAa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날에 만드셨던 그 빛에 쓰인 단어와 동일합니다. 창세기 1장을 환하게 비쳐주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입니다. 그래서 혼돈된 세상이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말씀이 우리의 지정의에 녹아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사람으로는 변화시킬수 없는 사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 하나니이 못 바꾸시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책을 보면, 말씀을 읽으면서 변화를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증에 실었습니다. 

때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 창세기 1장을 읽으면 힘이 납니다. 나의 인생에도, 나의 길에도 하나님께서 빛을 만들어 주시겠지..하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세요. 읽으시기 바랍니다. 

시력 좋을 때 성경 열심히 읽으시고, 청력 좋을때 말씀 많이 들으세요. 말할 수 있는 기력이 있을 때, 말씀 전하고 남을 칭찬하세요. 손에 힘 있을 때, 성경 넘기세요.

 14: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여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몽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얼마 후라고 되어 있지만 이 기간은 죽은 사자가 썩어서 거기에 벌 떼들이 집을 짖고 꿀을 저장해둘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전에 내려갔을 때에는 약혼을 목적으로 내려갔던 것 같고, 지금 다시 내려가는 것은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 위해 내려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때 그는 내려가면서 그 사자의 주검을 보았습니다. 아마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전에 자기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죽은 시체에 붙어 있는 벌집에서 꿀을 떠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9절입니다.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니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도 드려서 먹게 할 정도로 그는 많은 꿀을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 역시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나실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에게 금지된 행동 중에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될 규정이 있습니다. ( 6:7)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사자의 주검을 만졌고 자신을 더렵히고야 말았습니다. 자기만 더럽힌 것이 아니라 부모까지 함께 더럽힌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배신이며 불효입니다. 이는 그의 부모가 어떤 부모입니까? 기도하면서 거룩하게 양육했는데, 이제 그는 자기를 거룩하게 양육하신 부모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솜손이 이런 일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 행동이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에 오늘 우리 신자들 중에도 자기 행동을 통해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인가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얽매이지 않으려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그렇게 살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변명과 구실을 대며 반박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들은 아예 말씀의 기준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삶을 고집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른 통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신자를 통해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히 자기를 말씀으로 세우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삼손이 행한 더 큰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에 왜 그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또한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하나님과 깊이 만나며 물어보는 시간을 전혀 갖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그는 거기에서 나온 꿀을 먹으며 인생의 단 맛을 즐기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사사기 전체의 단면을 샘플로 보여주는 인생이 바로 삼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입니다. 삼손처럼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또한 순종하면 그 능력을 보장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대한 평가입니다. 

 21:25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17:6) 삼손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보세요.  14:2 & 7절을 보세요.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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