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아비멜렉(사사기 9:22-33)

 

오늘 본문은 요담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특히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때 어떤 방식으로 심판을 행하시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비메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하는데 그 심판하시는 방법이 바로 ‘만남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안 보고 계시는 것 같지만, 일거수 일투족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똑바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인식이 신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지켜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춤 중에 ‘막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춘다는 것이죠.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막장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막장 신앙’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은 막장 신앙으로 막을 내립니다.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여기서 ‘눈’은 영적분별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악간의 분별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이렇게 살면서도 스스로 말하기를 롬 1:22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다시 말하면, ‘지혜있다’는 말은 전문가, 잘 배운자, 똑똑한 자란 뜻이고, ‘어리석게’는 ‘mwrai,nw’로서 소금이 그 고유의 기능과 맛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우리 역시 신자의 본문을 잃어 버리면, 신자의 방향을 잃어 버리면, 신앙생활이 우왕좌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바로 요지경이었습니다. ‘막장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모습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요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했는데, 악을 보고도 판단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우매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손을 보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의 최후가 어떤 모양으로 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역사를 누가 주관하시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보이지 않는 세상이 보이는 세상에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가지 조치를 통해 역사의 배후에 누가 계시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악한 신을 보내셔서 배반하게 만드셨습니다.(22-25) 둘째로 가알이라는 악한 지도자를 보내셔서 대적하게 만드셨습니다.(26-29)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불이라는 대적자가 일어나게 하셔서 모든 일이 정리하십니다.(30-33)

 

일의 결국을 다 본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신앙의 모습이 없으니, 영적인 안목이 없으니 누가 일을 주관하시는지에 대한 무감각의 모습을 보입니다.  9: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났더라.” 사람이 어두워지면 이렇게까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영안이 열리는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배후에 일하고 계시는 것을 깨닫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영적 무지가 밝아지는 정도에 따라 예수님의 사역과 행적을 기술하였습니다. 한 예로,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서는 다른 맹인을 고치는 것과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1)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2)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3) 눈에 침을 뱉으시며 4) 안수하시고 5)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맹인이 말하기를 1)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2)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3) 그 눈에 다시 안수합니다. 4)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5) 결국 모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10장 마지막에는 맹인 바디매오를 고치는 기적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제자들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는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대로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요. 

 

영적 안목이 점진적으로 열리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서서히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무가 왔다 갔다한다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것은 우리의 영안이 밝히 열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이제는 더 낳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을 예비하셨느니라.

è “하나님 나라”할렐루야 ^^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겠습니까?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3년이라고 말씀합니다. 불법과 살인으로 쟁취한 아비멜렉의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작되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정권도 3년만에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볼 때에 우리 모두는 고통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선을 행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악인이 누리는 살롬을 시편 기자는 ‘악의 살롬’( 73:3, 악인의 형통/평안)이라고 말한다. 요담도 악인의 살롬에 고통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인의 형통은 언제까지 가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놔두실 것인가?의인은 그들을 제거할 힘도 없이 그저 무력하게 당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단지 요담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비멜렉의 형통함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반면 이 기간에 세겜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사사들때와 달리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사사들의 치리 기간은 보통 ‘살롬/안식’의 기간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저 모호하게 아비멜렉이 이스라엘 위에 군림한 기간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우리말 성경은 ‘다스렸다’는 말이 왕이 다스리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원문은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묘사할 대는 ‘말라크’와 방백들이 다스리는 것을 표현할 때는 ‘수르’라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단어는 방백들이 한 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나타내는 ‘수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기자가 이 단어를 쓴 이유는 그 왕권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잡은 악한 정권에 대해 하나님이 그냥 침묵하고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신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신이 아닌 악한 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직접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신들이 마음껏 활동하도록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상이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대적하는 구도로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귀는 그 본성상 하나님을 대적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마귀와 그 졸개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떤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마귀는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마귀는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분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욥에게 시험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에게 아무리 마귀가 시험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악한 신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악한 신이 역사하도록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9:12 “내가 그들을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여기서 떠나다는 ‘rWF’라는 동사로 삼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에서 ‘떠나다’란 동사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한다.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 악신이 반드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신 명령은 진행 명령형으로 지속적인 충만을 꾸준히 받아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잡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이 있다.  1:24, 26, 28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 두사”다시 말해, 내버려 두신 다는 것이다. 내버려 두신 결과가 무엇인가? 죄악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악신이 하는 역할은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 사이에 이런 반목적인 감정이 생긴 것은 아비멜렉이 수도를 아루마로 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42) 아비멜렉이 정권을 잡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세겜을 특별한 배려는 고사하고 찬밥신세로 전락시킨 아비멜렉에 대해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악신이 역사하기 전에는 이런 것들이 별 문제가 안 되었는데, 악신이 역사하니까 이게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악신이 역사하면 별 것 아닌 문제를 서로 원만하고, 다투고, 배반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있었던 것들이 참을 수 없는 문제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정권을 잡은 3년 동안 아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시면 그 칼을 피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형제를 죽인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았고, 세겜 사람들은 그 악한 일에 동참한 죄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일을 추진해서도 안 되지만, 악한 일에 가담해서도 안된 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웁니다.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인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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