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신앙 ( 15)

 

 

1.     족보와 믿음의 계보

유학을 나오기 전에 아버님의 고향에 들러 족보를 한 부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 전부터 집안 어른께서 족보를 가져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의 족보는 너희가 기록해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족보를 가져 올 때, 우리 박씨 가문이 어디에서 출발했고, 나라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느 선조가 잘 했고, 어느 선조가 잘 못 했다는 것을 쭉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20절부터 유다자손의 기업을 적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유대인들은 라스트 네임이 독특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와 같은 라스스 네임, 성은 없습니다. 그냥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혈통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라스트 네임을 들으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혈통의 사람인지, 그리고 같은 형제인지 아닌지가 금방 나옵니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라스트 네임이 같아지는 지점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계보를 후대가 적는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누구는 잘 하셨고, 누구는 잘 못하셨고..신앙의 족보를 한 번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2.     유다가 장자 역할

오늘 본문, 15:1-12절과 20~62절은 유다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의 경계를 세세하게 기록해 놓은 내용입니다. 그 사이에13~19절 갈렙이 아낙 자손을 쫓아내고 드빌 즉, 기럇 세벨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끼어들어가 있습니다.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유다 지파에게 먼저 땅 분배(축복)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은 창49장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했듯이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이며 좋은 곳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3.     르우벤이 왜 장자 지파의 몫을 잃어 버렸는지를 상고? 

야곱과 레아 사이에 태아난 아들고 야곱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는 어릴 때(5~6세 정도) 합환채를 자져다 레아에게 주었습니다.  30: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 아들이 가져온 자귀나무(합환채)를 조그만 나눠죠 이랬던 아이였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로 죽을 뻔 했을 때 형제들을 설득하여 죽음을 모면케 하였습니다.( 37:18-24) 그러나 그가 없는 사이에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림으로 요셉을 구하려는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 37:25-30) 그리고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는 과정에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야 할 때도 베냐민의 안전 귀향을 약속하는 뜻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볼모로 삼겠다고 할 만큼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42:37)

 

그런데 인간적인 죄의 유혹에 이기지 못해서 그만 실수를 합니다. 서모 빌하와 통간한 죄를 범합니다.( 35:22) 그 결과 장자권을 박탈 당합니다. (대상 5:1) 이 때문인지 그의 후손들에게서는 사사도, 왕도, 예언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49:3-4)

 

 30장의 유년시절,  37장 이후 책임감 있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창 35장의 치명적인 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없는 인생, 가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의 영향력을 가벼이 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4.     땅의 경계와 언약에 근거한 신앙

계속해서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의 경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15:20-62절까지는 땅의 경계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기록하는 이가 유다지파에 속한 땅 이름을 하나 하나 적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참 궁금합니다.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되었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언약을 이루셨네! 어쩌면 이렇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지파의 특성에 맞게 주셨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감개무량하지 않았을까요? 적어가는 이나 발표하는 것을 듣는 지파나 가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적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행하실 것을 생각하면 비록 오늘 내가 광야를 가고, 요단강을 건너며 여리고성앞에 있든지 아이성 앞에 있는지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수 많은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지난 날의 삶의 간증들을 머리 속에서 하나 하나 꺼내어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책에 주로 적어 놓는 편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 때 이런 은혜가 있었지..참 좋습니다.

 

5.     갈렙의 믿음과 딸, 악사의 믿음 비교

13~19절의 내용은 매튜 헨리는 긍정적인 믿음의 예로 해석을 합니다. 유다지파, 갈렙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믿음의 보고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이 내용은 믿음의 긍정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갈렙의 신실한 믿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성을 믿고 늘 가족에게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늘 그랬기 때문에 가족에게 하는 것은 아마 더 진하게 했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니 가나안 땅은 정복 되고야 말 것이라는 열정과 신앙이 조카 옷니엘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옷니엘은 훗날 사사로도 쓰임 받습니다. 믿음의 확장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믿음의 좋은 가문에서는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사는 조금 현실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악사의 행동을 조금 부정적인 시각에서 믿음의 부족으로해석을 했습니다. 칼빈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해석한 것은, 험한 산지를 요구한 갈렙처럼 그 땅이 황폐해도 하나님만을 신뢰하면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114:8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과 현실 중심의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6.     아쉬움과 죄의 영향력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아쉬움과 도전을 주는 것은 마지막 63절 말씀입니다. 62절로 끝나면 훨씬 좋았겠지만 마지막은 유다 지파가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지 못한 것으로 끝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축복의 땅, 기업 분배에 제일먼저 등장할 만큼 유다 지파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그럼에도 실수를 적어 놓은 것은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냥 방치해두고 나면 언제든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무디어지게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는 처음엔 겁나고 두근거리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반복되면 덤덤해 지고 더 계속되면 무 감각해집니다. 유다 지파가 맨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은 작은 것일지라도 잘라내고 정복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 외적인 적이 있습니다. 외부의 적보다도 무서운 것은 내면의 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 ‘나태함’. 처음에는 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나를 영적인 거룩함으로부터 끌어내리는 대적이 되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잘라 낼 것은 잘라내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 있는 내, 외적인 적은 작은 것일지라도 처음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14절을 잠시 보면,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가나안 땅의 남방을 점령한 여호수아 군대는 헤브론 산지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온 산지를 수색하여 아낙 자손을 진멸한 바 있습니다.  11:21-22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14절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땅을 아낙 자손이 다시 점령하였으며, 갈렙은 헤브론 땅을 분배 받고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재차 아낙 자손을 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얻는 영적 교훈은 죄의 영향력은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늘 우리 곁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존 오웬은 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죄 죽이기를 신자가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7.     결단적 신앙 : 땅 정복 속에 드러나는 신아의 자태

우리의 내면에 있는, 다시 올라오는 죄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가져와서 고백하고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이런 영적 전투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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