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없이 값없이 ( 55:1-9)

 

 

캘리포니아에서 3주 이상 비가 지속적으로 내려서 때아닌 겨울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중부 지방은 토네이도가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터전을 인정도 없이 다 쓸어 담아갔습니다. Covid의 확산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역시 건강에 대한 염려가 생겨났습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일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라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킴벌리 커버거란 분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이 시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우리가 살다가 후에 알게 되는것을 과거의 어떤 싯점에서는 알 수 없기에 많은 것을 잃고, 후회하곤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결말을 앞당겨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있들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를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들의 어떻게 풀려갈지 알 수 없을때가 많습니다. 때론,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일이 풀려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가끔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어떤 때는 우리가 생각한것 보다도 더 나은, 멋진 결과가 나올때도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시대적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대략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때입니다. 하나님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들처럼,후에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결과를 알았더라면, 자신들의 생각과 길을 그렇게 고집하지 않았을 것일텐데 말입니다. 이 말씀을 듣었던 자들이, 그 당시 ‘후에 알게 될것을 지금 알았더라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더, 자유롭게,  즐거운과 기쁨이 있는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바벨론에서 내로라하는 지위를 얻었을 겁니다. 공직으로나간 사람도 있고, 사업으로 한밑천 잡은 사람도 있고, 전문가 집단에 속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별 볼일 없이 차별받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겁니다. 바벨론 여자나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유대인은 왜 없었겠습니까.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라도 그들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라는 사실만은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더 쉽게 이런 상황에 공감을 할 것입니다. 

 

3절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와와 들으라” 말씀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들으면, 그들의 영혼이 살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이들의 영혼에 관심하고 계십니다.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꿰뚫어 보시며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그들은 비록 풍요와 파워가 넘치는 바벨론이란 곳에 살곤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 2절에 보시면 그들은 하나님 눈에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으로 사고,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간곡히 요청하고 계십니다.

 

더아가서는,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듣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찾고, 그분을 부르라 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오라는 외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만 영혼이 생명을 얻고,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7절에서 다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자들의 모습은 어땠던 것일까요?

 

하나님 눈에 그들이 모습이 어렇게 비춰지고 있었습니까?  거대한 왕국인 바벨론 문명 아래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 무엇을 쫓아 살고있었던 것일가요?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침략으로 멸망당하는 아픔과 설움,절망을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포로기를 견디다가, 그들에겐 자신들을 구원해줄 하나님께 경청하기를 포기하며 세상에 다른 곳에서 양식을 찾으며, 채워지지 않을 것들을 위해 수고하며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기 보다는 세상의 힘과 풍요라는 우상을 쫒으며,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위에 두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었을지요?

 

예루살렘에서의 생활보다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이 가능한 바벨론에서의 삶에 그들이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나름의 육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그저 먹고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그들의 영혼은 허전한 것입니다. 마르바 던 교수도 [고귀한 시간 낭비]란 책에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만일, “잘못된 삶의 목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고 있다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갈망’, 쉽게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깊이 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채우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절절한 목적’으로 채우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왜 인간의 목마름의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인해서 근본적으로 공허한 심령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8:11-1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삼상 3:1 엘리 제사장때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더라

 74:9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는 아는 자도 없나이다

 

예레미야 선자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이전에 유다 백성들이 두 가지 큰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기에 을 행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23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복수]이니라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물을 얻기 위해 웅덩이들을 파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판 웅덩이들이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첨 하나님을 배제시킨 가운데 인간 스스로 영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벗어나면,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책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바로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변국의 정세를 따라 좌고우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북으로 앗수르, 남으로 애굽, 동으로 바벨론의 형편에 따라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광야에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아 보겠다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이민와서 믿음대로 잘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신앙 버리고 현실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렇게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살아간 그들의 현실적인 상태가 어떻습니까? 바로 목마름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외침으로 다시 돌아 갑시다. 이사야가 볼 때 목마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마른 방식으로, 즉 헛된 일에 열중한다는 겁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양식 아닌 것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바벨론 제국이 제시하던 삶의 방식과 내용을 가리킵니다. 50년 전에 이곳으로 끌려와 나름으로 자리를 잡고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한평생 붙들려고 했던 삶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속적인 성공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성공으로 일컬어지는 삶을 오히려 헛되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잘살게 되었어도 여전히 목마르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보내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언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의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9)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4장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벌어졌던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정오, 점심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온 여자에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만나시기를 축원드리니다. 손해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무언가 다른 대상을 믿게 될 겁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자신만 믿겠지요. 자기를 믿다니, 정말 초라한 세계관입니다. 저는 예수가 영원한 생명수라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올인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를 의지하는 한해가 되십시다. 할렐루야 ~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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