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뿐 아니라 ( 5:1-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구원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영생이나 천국과 같은 하늘에 복도 들어가 있지만 그와 반대 되는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들도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떠남도 있고, 옛 사람의 죽음도 있고,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아픔도 담겨져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비 주류로 살아가야 하는 고난도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마냥 기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속에는 서로 상반된 것들이 한 세트로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노아가 당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은 복이었지만, 방주를 120년동안 지으면서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은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복이지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고통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은 아픔이에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기득권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상대적으로 따라오는 아픔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는다는 것은 기존의 것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기존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다는 것은 곧 기존으로부터 분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구원 속에는 평안도 있고 환란도 있습니다.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평안과 환란은 극과 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십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하시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십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평안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환란입니다.

우리에게 선택을 하라고 하면, 어떠할까요? 나이 별로 평안과 환난을 골고루 배치하시겠습니까? 평안을 선택하고 환란은 피하고자 할 것입니다. 육신은 평안을 원하지 환란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믿음의 여정 속에 선물로 담아 놓았습니다. ? 그랬을까요?

믿음의 여정 속에 환란을 담아 놓은 것은 마치 흰 쌀 밥에 검정콩을 섞어 놓은 것과 같아요. 우리는 마치 편식하는 아이들처럼 흰 쌀 밥만 먹고 싶은데 하나님은 밥 속에 콩을 섞어 넣고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콩을 골라 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안 돼! 그것 먹어야 건강해져! 그런단 말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화평은 좋은 것이고 환란은 밥에 콩처럼 싫은 것이에요.

먼저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모두가 좋은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자가 누가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면 전갈을 줄 자가 누가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란 말입니다. 믿음의 여정 속에 고난을 담아 놓았다면 그것 또한 필요해서입니다.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은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시편 기자는 고난당함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119:71) 어째서 고난당함이 유익일까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의 율례와 법도를 몰랐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욥처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들어 왔는데,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과 같아요. 우리가 알듯이 욥의 고난은 땅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천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소와 폐암)

무슨 말인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는데, 고난당하고 난 후에는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을 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는 좋은 것이에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 비밀을 알아야 신앙생활에 시험에 들지 않아요. 한걸음 더 나아가 고난이라는 문제 가운데서 육신은 힘들지만, 영혼은 자유하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우리는 우리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구분 합니다. 그것도 자기 육신 위주로 말이에요. 육신이 편하면 좋다고 하고 불편하면 싫다고 합니다. 육신중심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육신에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다 좋은 것이에요. 우리 신앙에 다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데 비도 와야 하고 햇빛도 있어야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비와 햇빛으로 농사를 지어요. 비는 환란과 같고 햇빛은 은혜와 같아요. 환란을 통해서 하나님 은혜를 알아가고 은혜를 알기 위해서 환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평안도 주시고 환란도 주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웃긴게, 비오면 비온다고, 햇볕나면 덥다고 그럽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사해요. 

3-4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다만 이뿐 아니라”고 합니다. 는 말은 앞에서 말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라는 것은 앞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반전(反轉)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는 하나님과 화평만 있는 것이 아니고 환란도 들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왜? 환란을 넣어 놓았는가 하면 환란을 통해서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천국을 소망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할까요? 천국=하나님 나라 < 내 나라 

우리 안에는 가나안[애굽-광야-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이름하여 우리 옛 사람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같은 거인 족들과 싸움을 합니다. 우리 옛 사람과 싸워요. 우리 옛 사람을 일컬어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않지요. 그 결과, 그들의 꾐에 넘어가요. 그들의 신을 섬겼어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가나안 신을 섬기고 있었어요. ? 그런 줄 아세요. 가나안에서 살려면 가나안 신을 섬겨야 행복하게 잘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에서 못 이루고 살았던 것을 가나안에서 이루고 살고 싶은 것이예요. 누굴 이용해서요.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이 더 잘 살아요. 그러니 세상의 신을 섬기는 것으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같아요. 

지금 우리 몸이 그래요. 우리 몸은 이 세상에서 났어요. 이 세상과 너무도 친숙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살려면 세상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세상에서 하늘에 방식으로 살려고 하면 못 살아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말이에요. 그럼 우리 안에 성령이 너 왜? 그러니 괴롭괴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마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 끄집어내어 놓고 애굽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고 달달 볶아 댄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린 죽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괜히 부담만 되는 거예요. 또 금요일이네, 벌써 주일이야.. 내가 생각한 것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한단어로 ‘복’이었는데..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속된 말로 예수 믿기 싫다는데 왜? 예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이 알아서 움직이게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요. 교회가 좋아요. 성도들이 좋아요. 믿음을 받은 성도는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합니다. 교회와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오고! 봉사를 해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엔 억지가 없어요. 억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계획하면 어떤 인생으로 계획을 할까요. 평안한 인생이겠지요. 행복하고 평안한 인생이 되려면 고난이 없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고난이 없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도리어 정과 욕심을 채우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도 있지만, 세상으로부터 버려짐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화평과 환란은 햄버거처럼 고기와 빵을 한 셋트 그대로 받는 것이지 골라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에요. ? 성도에게 고난이 필수 코스로 주어지는 것인가요? 

이건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가운데서 바라본 세계와 같아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이쪽에 있을 땐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은 저주이고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불 속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 너머에서 영생으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벨론 왕은 죽으라고 불 속에 던져 놓았는데 그 죽음 너머가 영생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쪽에선 보면 죽음이지만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죽음이에요. 성도가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영생의 세계에서 죽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겉으론 아픔이지만 속으론 기쁨이 있어요. 고난 자체가 자랑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이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선진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면서도 낙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고난 속에서도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도록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고난이 심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강하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들이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어려울 때이지요. 우리 인간은 본성상 편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어렵고 힘이 들어야 찾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환란 속에 밀어 넣고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평안 할 때 하나님과 멀어져 있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져요. 이게 우리의 실존이에요. 

? 바울은 이런 말은 합니까? 성도의 구원만 이야기할 것이지, 성도의 환난까지 이야기하면서 기뻐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성도가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보면 필연적으로 환란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시험이나 환란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으니 안심 하라는 말씀이에요. 로마서에서 굳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나 요즘이나 환난과 고난을 중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셨나 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여정에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자들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부어지고 있고 변함없으니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8:15-18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느 날 예수님이 은혜로 찾아 와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말이에요. 그러니 주님께서 책임지고 끌고 가실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보기 원합니다. 당하는 스데반의 눈을 열어서 하늘을 보게 한 것처럼 우리 눈을 열어서 하늘 보게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방으로 아람군대로 갇히게 된 현실 속에서,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절망과 좌절인 게하시, 그의 게하시의 영의 눈이 열리니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보입니다. 그래서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란 가운데 좌절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소리쳐요. ~ 뭐 그것 가지고 죽네 사네 하느냐! 날 봐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눈에 비늘을 벗겨 주세요. 세상만 바라보는 눈을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는 눈으로 만들어 주세요.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게 우리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보게 하세요. 우린 눈을 뜬 자들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고 사세요. 우리 주님 곧 오십니다. 

세상이 말해주고 있잖아요. 온 세상이 말씀대로 갖가지 징조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잖아요.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십니다. 너희 구속이 가까웠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 환란 속에, 풀무불과 같은 고통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셰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23 “이 세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그러나 2절 더 가 보십시다.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할렐루야 ! 

본문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환란 속에서도 인내하고 소망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

73편 몇 구절만 들어 보세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고,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전파하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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