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라 ( 1:6-12)

 

저는 닭에 대한 안좋은 추억, 아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닭을 보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만큼 평생 닭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 밤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사랑하던 스승을 멀리했던 밤이었습니다. 스승을 버리고 떠났던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영적으로 무너져 스승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영적으로 어두운 밤이 깊어지자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의 역사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스승을 세 번째 부인하던 그날 새벽에 하나님께서는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전령을 보내셔서 저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닭 울음소리였습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본문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영적인 암흑 속에 있던 나오미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의 메시지를 잘 받아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복의 메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영적으로 암흑속에 있을 뿐 아니라, 낭패와 실망을 당한 후에 그녀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됩니다. 찬송가 한 소절이 떠오릅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후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 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 자신을 먼저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부르시는 회복의 음성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돌아가기로 결심함(6)

이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셨다는 표현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자를 보내셔서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안식을 얻게 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자 빵을 얻기 위해, 흉년을 피해 약속의 땅을 떠났던 나오미가 이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합니다. 지금 그녀는 남편도 잃고 두 자식마저 잃은 상태입니다. 더 이상 더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 망하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낯선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남편을 따라 모압 땅으로 가긴 했지만 고향 베들레헴에 양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먹을 것까지도 마련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른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오미는 이런 소식을 통해 끝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권고, 즉 돌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나오미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소유자임을 말해줍니다. 

- 우리가 아무리 문제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즉 영적인 메시지는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진노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벨도 없으셔, 그러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은 언제나 정확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혼자 남게 된 외로움이나 양식 걱정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육체적인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즉, 하나님의 품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기로 한 그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과연 나오미가 그런 의도로 돌아왔을까요?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나오미가 진정으로 이것을 깨달았는지는 더 살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오미의 관심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나오미의 결정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양식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베들레험, 빵집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나오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양식’에 대한 그녀의 관심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실은 이 모습은 나오미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조금 문제 있으면 하나님 떠나고,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연약함입니다. 우리 선한목자 교인들은 나오미처럼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육의 양식을 위해 영혼을 팔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8:3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마 4:4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빵을 먹기위해서도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서라면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요즘 시대를 Wellbeing 시대라고 합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천리를 달리지 않습니다. 영혼의 Wellbeing을 위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영혼의 빵집’을 찾아 다니고 계십니까? 영혼의 빵집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선한목자교회에 오신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할렐루야..좋은 영혼의 빵집이 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아멘..

- 우리는 여기서 세상적인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 것, 부흥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회복과 부흥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떠났던 자들에게 교회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합니다. 우리가 나가서 백 마디로 전도하는 말보다, 교회에 부흥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풍성할 때 더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 정말 많이 기도하고 헌신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 지역에도 많은 영혼들이 영혼의 빵집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우리 선한목자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하며, 그리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십시다. 할렐루야..

 

이제 그녀는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돌아섰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약속의 땅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한 인간이 참된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한 시점입니다. 마치 탕자가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15:19)”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혼 살리기 프로젝트’

 

우리는 탕자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 아들을 영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기 전부터, 아니 나오미의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난 때부터 하나님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십니다. 교회를 떠난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떠난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영혼에게 가서 외치십시오. 하나님의 심정을요.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

“언제라도 좋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 돌아 오기만 하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주님을 떠나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역시, 지금 주님께로 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룻기 1장에는 두 가지 결단이 나옵니다. 하나의 결단은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결단이고, 또 다른 결단은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어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단은 한 집안을 무너지게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주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단은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결단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바른 결단을 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바른 결단을 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리가 있다면 빨리 그 자리를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결단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권면하십시오. 주님께로 어서 빨리 돌아가라고요. 그때 여러분 자신 뿐 아니라, 여러분의 집안이 구원받고 축복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과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이 채워주시는 하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자부를 돌려 보내려고 설득함 (7-18)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 보내고자 했습니다. 만약 나오미가 완전히 회복되고 신앙이 굳게 서 있었더라면 자부들을 돌려 보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축복이 보장된 약속의 땅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돌려 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두 자부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하나님의 실패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자부들에게 하나님 만을 붙들고 함께 돌아가자는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그녀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복되지 못한 불신앙은 자신 뿐 아니라, 주님을 찾고자 하는 이들, 신앙의 결단을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나오미가 두 번에 걸쳐 자부들을 설득하자 오르바는 떠나고 룻은 그녀를 붙쫓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그녀를 떠난 오르바를 행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15절에 “네 동서가 그 백성과 그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아마 나오미 생각에 자부들이 모압으로 돌아간다면 그 땅의 신인 “그모스”를 섬기게 될 것을 염두해 두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나오미는 오르바가 이방신을 섬기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보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 따라 가려고 하는 룻까지도 그렇게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 더 멀어지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8절에는 ‘Go, return, each of you to her mothers house& 12절에서는 ‘Turn back, my daughters; go your way오늘 본문 이후 오르바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과 관계, 그 사람에게 하는 조언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바른 판단, 바른 조언이 불가능합니다. 특별히 교회 리더는 영적 조언을 잘해야 합니다. 내게 은혜가 없다고 생각되거든, 성령충만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든 어떤 조언도 하지 마세요. 

 

 

은혜위에 굳게 서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오는 영혼에게 도움이 안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도리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나오미의 심경과 의도를 살펴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가 고향친구들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며느리를 사랑한다면 이방신에 찌들려 있는 그들을 참 신이신 하나님께로 오히려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은혜안에 있지 않으면 말조심 해야합니다. 어떤 결정도 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보면, 은혜가 없은 경우에는 대부분, , 미래에 대한 판단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게 있는 자원을 가지고 나의 미래를, 비전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나의 삶을 하나님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하여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해석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어떤 조언을 하십니까? 애야, 엄마, 아빠는 너를 도와 줄 수 없다. 네 갈길을 네가 알아서 가거라. 그러나 이렇게 조업합시다. 애야, 우리는 여기까지지만, 우리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단다. 너는 그분을 신뢰하거라. 이 엄마, 아빠가 너 뒤에서 너를 위해서 기도하마] 이렇게 조언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대학부터는 my way를 가야겠구나.’라고 말입니다.

 

나오미는 계속적으로 나는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소망이 없으나 나의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다고요. 

 

절대의존감정 & 상대적 의존감정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절대의존감정이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의존할때 나타나는 감정을 절대의존감정이라합니다. 반면, 이 아이가 장성하면 자신의 것과 비교하여, 다른 아버지와 비교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의존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상대적 의존감정이라 합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신과 비교해서 보고 나서 믿을 만 하면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물질, 명예, 학위에 비례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물질이 많아지면 하나님을 의존하는 절대적 감정이 줄어듭니다. 이미 상대적의존감정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신앙의 모습을 싫어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이방여인 기생 라합도 ‘상천하지의 하나님’( 2:11)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 땅에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학문이 무엇일까요? ‘비교종교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십니다. 

우리도 비교하면 싫어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십시오.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내를 다른 여인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자녀도요. 정상적으로는 다 싫어합니다. 왜 그런줄 아세요? 우리가 누구입니까? Imago Dei’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을 자들 아닙니까?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절대로 비교하지 마세요.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배려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오미는 인간적인 배려의 측면만을 보입니다. 영적 도전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르바는 이방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룻도 그럴뻔 했지만 그녀의 신앙으로 인해 나오미의 곁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육적 축복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나오미의 배려를 참으로 훌륭한 시어머니의 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느리를 ‘딸’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그녀가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축복은 며느리에게 남편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을 줄 때, 이 수준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올바른 크리스천 부모는 자녀에게 영적인 유산을 많이 남겨줍니다. 기도하는 법, 믿음의 눈,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 따르는 법…등 말입니다. 

 

나오미의 인간적인 사랑 역시 훌륭하지만, 그녀는 오르바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방해하는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어른으로서 은혜의 자리에 올바르게 있지 않으면, 이처럼 나도 모르게 신앙의 방해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최선의 배려이고 은혜이며, 사랑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최고의 방해꾼이라 이 말입니다. 

 

나오미가 은혜의 자리에 바르게 섰더라면, 며느리들 모두를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오르바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부모된 여러분, 자녀에게 어떤 사랑을 주고 계십니까? 은혜의 자리에 서서 영적 축복의 징검다리가 되십시다. 

 

저기 멀리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교회이야기 입니다. 한 목사님이 부임하셨는데 교회 부흥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이분은 새 가족만 오면, 교회 비난, 목사 비난, 성도 비난을 함부로 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새가족이 다음 주에 교회에 다시 오겠습니까? 절대로 안옵니다. 목사님이 전화하고, 이 메일을 보내고, 문자 메시지까지 보내고, 만나서 사정을 해도 안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걸림돌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에 빠져 있으면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신자는 개인적으로는 고통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디딤돌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선한목자교회의 태동에서 디딤돌이 되어 주신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선한목자 교인들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시기 바랍니다. 디딤돌은 다른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내가 밟혀주는 역할입니다. 내가 밣혀준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고통과 수고를 통해 다른 영혼들이 이 강을 건너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섬길 수 있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을 때 교회는 생명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선한목자교회 성도님들은 걸림돌이 아니라 모두 디딤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을 통해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받고,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룻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룻이 계속해서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 땅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룻이 이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겠다는 맹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 자신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죽음과 무덤까지 인용해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이쯤 되자 나오미는 룻의 굳은 결심을 보게 되었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습니다.

 

나모미의 신앙을 보십시오. 생명걸고 믿겠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고..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나오미보다 더 깊은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실은, 엘리멜렉, (여호와는 나의 왕이시다)을 남편으로 모시고 산 나오미의 신앙이 더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룻의 고백을 빌리면 베들레헴 흉년때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나오미가 룻의 이런 신앙을 환영하며 칭찬했다는 표현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그녀를 모압 신과 모압 백성에게로 돌려 보내려고 했습니다. 반면 룻은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합니다. 은혜떨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누가 귀한 신앙고백, 간증하면 칭찬하며 격려해야 하는데 그냥 흘려 보낸다는 것입니다. 

‘흥, 너만 그런 간증있냐, 나도 있다’시기 100%, 은혜 0%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흉년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우리의 생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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