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입다 ( 11:4-11)

 

 

입다와 같은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나를 쓰시는데 망설이시겠습니까? 입다가 머문 곳은 므스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을 피하여 살았던 그, xr;B' ~ynIP'(바라흐 파님) 형제들의 얼굴을 피해서 멀리서 살았던 그이지만, 그는 그런 상처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자입니다. 요셉의 인생도 그랬습니다.  50:19-20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입다가 도망하다는 표현을 원문에서는 바라흐 파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얼굴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째려보았길래. 얼마나 비웃었길래, 얼마나 무표정으로 보았기래, 얼마나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 보았길래, 얼마나 따가운 시선으로 보았길래, 얼마나 온기 없는 얼굴로 보았길래.안 봐도 상상이 갑니다. 콩쥐와 팥쥐처럼요.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신자가 교회를 떠나는 경우를 종종 보거나 듣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내가 경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 사람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입다도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으로 갈 때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표정관리 잘해야 합니다. 얼굴관리 잘 하시라 이 말입니다. 신자는 얼굴에서부터 신자 티가 나야 합니다. 신자 티요. 우리 교회에는 우리의 얼굴때문에 그이 보기가 힘들었다.는 말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인간의 신분과 지위와 환경에 재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입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고 포기하며 그 속에 뭍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준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를 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입다처럼 ‘여는 자’가 많았으면 합니다. 기도, 헌신, 찬양, 치유, 전도, 회복, 부흥, 문제 해결….등 말입니다.

오늘 본문 4절 “얼마 후”는 사실 여러 날들이 지난 뒤에라는 뜻입니다.  11:34을 보면 그의 무남독녀 딸이 거의 성장할 때까지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입다를 내쫓은 사람들도 쫓겨난 입다도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각기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을 시점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입다를 기억에서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공격을 해 들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다를 다시 생각해냈고 입다를 데려오기 위해 돕 땅으로 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입다의 놀라운 협상기술을 보게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데려오려고라는 단어의 원문은 빼앗고 탈취하듯이 데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입다가 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오겠다는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 만큼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입다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관이라는 말은 전쟁 때에만 필요해서 임명하는 군장을 의미합니다. ( 10:24) 그들의 뉘앙스를 통해 입다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전쟁에서만 나를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또 다시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장관이라는 단어는 !yciq'이고, 머리라는 단어는 varo입니다. 이 둘은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일시적 리더를 말하고, 후자는 영구적인 리더를 말합니다. 입다와 장로와의 대화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한쪽은 일시적으로 써 먹으려고 하고, 다른 쪽은 영구적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중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double mind라 할 수 있죠..하나님 앞에서 더블 마인드를 가지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잘 했습니다.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랬던 이스라엘이이랬던 이스라엘의 묻던 신앙이

이 모습이 혹시 나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찾기 보다는 세상말로 쿨(cool)하게 입다를 찾은 것입니다. 싼 값에 문제 해결을 해 볼려구요. 이런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 없습니다. 입다를 통해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대책이 없어요. 

우상 숭배 안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고, 인간적인 방법 안하면, 우상 숭배하고여호와 하나님만을 요리저리 피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러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합니다. 하나님을 일시적인 문제 해결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관계를 원하시고, 우리는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식이고참 환장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못된 근성을 입다를 통해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한 번 봅시다. ^^ 흥미 진진하죠..하나님과 사람의 대결이라..

그래서 그는 과거에 그들이 자기를 버린 사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금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7절을 보세요. 입다가 한 첫 마디는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였습니다. 이 표현으로 보아서 형제들이 자기 힘으로만 입다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길르앗 성읍 사람들이 입다를 쫓아내는 데 협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입다에게 큰 상처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왕따시키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어느 누구를 따돌려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저 멀리 LA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는 왕따문화가 있답니다. 끼리끼리 어울리고, 그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왕따를 시킨다는군요. 이런 모습, 우리 교회는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면서 왕따를 시키다가, 정말 자기들에게 필요한 때가 오니까 찾아갔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자기 감정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미워하다가,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입다의 말투를 보세요. 원래 사람이 상처 받으면 말투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중유골이 됩니다. 말속에 를 심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말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저 멀리 LA에 있는 교회에는 그런 문화가 있답니다. 말을 직선적으로 자기 감정 실어서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지 마십시다. 언어습관을 바꾸는 것은 거룩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첫 출발입니다. 말은 생각과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좋은 말은 금 쟁반 위에 잘 익은 사과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말 속담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오는 말이 꼬아도 가는 말은 곱게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꼬는 말 할 때, 예쁜 말을 금쟁반에 담아서 보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뽕 갑니다. 뭔가 다르다. 역시..예수 믿더니 달라졌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해 보세요. 그러면 날리 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대간대 없고 세상과 욕만 들리도다.

오랫만에 신자답게 살아 보려고 했더니, , 주님 오늘까지만 입니다. , 10원짜리, 20원짜리야, 띠발따발…” 이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집니다. 

아마도 입다가 지금 그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평소에는 따돌림을 당하다가 위기의 때가 되니까 사람들이 손을 벌리고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입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입다가 평소에 준비된 자였기에 그들이 찾아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찾아왔겠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제 장로들은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머리라는 말은 전쟁 뿐 아니라 평화 시에도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입다는 더 이상 그들이 과거에 주었던 상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제시한 것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장관(검은 마음)  머리(하얀 마음) / 용서를 구하고 부탁을 할 때는 진실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멋적으니까 장도들처럼 할 수 있으나, 나중에라도 진실한 마음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통하거든요.

또 반대로, 지도자로서 입다의 성숙한 인격이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컸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리더는 즐겁게 억울한 일을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리더들은 아무리 큰 일을 만나도 넓은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논쟁해서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해서 꼭 이기는 게 아닙니다. 입다는 자신의 상처가 가슴이 찢어지도록 컸지만, 암몬이 아니라 그들에게 당장이라도 복수해주어도 속이 풀지지 않을 아픔이었지만 그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갚는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용납해 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입다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입다는 성급하게 승리를 자신있게 확신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대신 승리를 주실 하나님에게 눈을 돌기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우리는 누가 나를 칭찬하려 하면, 빨리 그 사람이 내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서는 찾고 계십니다.  7:2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빼앗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십계명 제 1계명이 무엇입니까?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beside)me.여기 me ~ynIP'이라는 얼굴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호와의 얼굴 옆에, 여호와의 얼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지 말라는 말은 5절에서 다시 설명합니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두지 말라고 할때 영어의 표현은 shall이라는 조동사가 쓰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래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의지미래입니다. 너의 의지를 담아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섬기다는 db;['라는 동사로 예배하다. 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정의한 하나님 여호와를 만을 예배하고, 그분 만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여호와는 hw"hoy> ~yhil{a/입니다. 앞에 있는 hw"hoy>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유일하게 존재하는 One, 철학에서는 일자, 즉 다른 것은 살아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얼굴 앞에 다른 신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굴 앞에, 남편이, 아내가 다른 여인을, 남편을 데리고 와 보세요. 우리도 싫어하는데 하나님은 왜 안 그러실거라 생각하세요. 아니 왜 그렇게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하잖아요. 질투라는 단어를 가만히 보면, 두 단어 모두에 계집 여자가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질은 병과 관련된 병 질, 투는 돌 석자와 합성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질투를 하면 마음이 괴롭워 병이 생기고, 심지어는 상대를 향해 돌이 생깁니다. 안 그런가요진짜로 좋아하면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에 돌이 생겨 딱딱해 집니다. 굳어집니다. 잘 흐르던 혈이 흐르지 않습니다. 잘 먹던 음식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이 마음 속에 있는 돌을 상대에게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로 하여금 질투를 일어나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보세요. 3, 4 대까지 죄를 갚겠답니다. 그러니 누가 나를 칭찬하면 빨리 그 영광 하나님께 돌리세요. 정신차리세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입다는 승리의 원인이 자기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허락하심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지 않으면 자기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장로들과의 협상과정에서 여호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협상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10절에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장로들도 협상 테이블에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시니  여호와께서 우리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보고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coramdeo life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대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화 (10:10-16) 입다와 장로들의 대화 (11:4-11)
암몬의 압제 (문제) (10:7-9) 암몬의 압제 (문제) (11:4)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간청 (10:10) 입다에 대한 길르앗의 간청 (11:5-6)
하나님의 빈정거리심 (10:11-14) 입다의 빈정거림 (11:7)
이스라엘 백성의 재청 (10:15-16a) 길르앗의 재청 (11:8)
하나님께서 일회적으로 사용되기를 거절하심 (10:16b) / 버릇을 그치기로 작정하심 입다가 기회를 포착함 (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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