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 13:1-2)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안할 때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안 속에서 자신들의 안락에 깊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고 쾌락에 도움을 주는 신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여호와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쾌락이 인간의 최고의 선의 상태라고 했다. 번영신학이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급한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이라면 평안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안할 때, 이 평안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신앙이라면 힘들 때도 역시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치우쳤습니다. 지난주에 사사들의 삶은 자기 자식을 위한 것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식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이 삶의 목적이었고 전부였던 것이 당시 사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도 그렇다. 그것을 위한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평안할때든 그렇지 않을때든 상관없이 동일하다. 

결국 사사의 삶이 그랬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그들을40년 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심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내를 통해서 삼손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생각할 것은, 이왕 구원하실거면 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악을 본다면 40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압제를 당해도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인의 압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통이 무엇 때문인가를 깊이 인식할 때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포기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능히 포기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대다수의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는 보탬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삶에 있어서 번거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악행의 반복]

소사사 압돈이 팔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자 이스라엘 자손은 또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1절을 읽어 보세요. 여기서 다시라고 번역된 단어는 @s;y"으로, 오히려 계속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폭되다라는 의미입니다. Increase, add up

삼손이 태어나기 직전,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번에는 이스라엘을40년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옷니엘(8), 에훗(18), 드보라/바락(20), 기드온(7), 아비멜렉(3), 돌라/야일(18), 입다/입산/엘론/압돈(40)

입다: 여는자, 입산: 증거자, 엘론: 힘이 있는 자, 압돈: 독창성이 없는 자

[등장인물소개]

이런 상황에서 등장 인물이 소개됩니다. 2절을 보세요. 마노아라는 소라 지방의 단 지파 소속으로 등장할 뿐 그의 특징, 외모, 소유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노아는 x;Anm' resting, 이라는 뜻으로 노아,x;nO와 그 어원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을 가진 마노아의 삶 가운데 그 어떤 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롬의 땅에서 엔살롬을 산 사람들이다. 

또다른 소개는 그의 아내입니다. 특별히 아이가 없는 불임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2절을 보세요. 

이 여인의 고통은 불임 개념의 반복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경기자가 단순히 부인의 불임을 언급할 뿐 그녀의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나이가 얼마인지, 남편에게 투정을 부렸는지, 하나님께 나아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요청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완전포기, 어떤 대책도 없다. 기도도 하지 않는 상황, 한나의 상황과 비교해 보라. 

여성이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단지 그 여인의 인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신부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내요 하나님은 남편으로 예언서에 많이 비유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를 창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지금 부부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침묵을 성경 기자의 의도록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불임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주는 유비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은 불임 중이었고 희망이 없었습니다. 미래를 스스로 창줄할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불임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무대]

우리는 이 같은 모습을 삿 15:11-13에서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유다 지파 변경에 나타나 삼손을 붙잡아 넘길 것을 요구하지 유다인 3,000명이 삼손을 잡으려고 와서 한 말을 보라. 

 15:11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유다인들은 블레셋 사람의 통치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유다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에 대항해서는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던 자들이 동족인 삼손을 잡기 위해 3,000명이나 동원되었다는 점은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얼마나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교우들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한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노아도, 그의 아내도 그들의 불임의 상황에서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노아의 아내의 불임은 이적적인 삼손의 출생을 보여주는 적절한 배경이 될 뿐 아니라 절망으로 자포자기에 이른 이스라엘의 처절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무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임은 단지 희망 없는 인류의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임의 상황에서 생명을 부여하시는 창조사역을 보여 주시는 장입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보여주실 장인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그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지금의 경기는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불임의 상황과 동일합니다. 경기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황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말씀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r<a'(h' taeîw> ~yIm:ßV'h; taeî ~yhi_l{a/ ar"äB' tyviÞarEB.

여기서 창조하다 ar"äB' 에서 를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

 ar"äB'라는 글자에서 "äB'’’는 위, 아래, 뒤는 다 막혀져 있습니다. 과거, 현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라입니다. 미래만 바라보라는 뜻에서 바라입니다.

  1. 앞만 보세요. 삼손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바라보세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하나님을 말입니다. 
  2. 쾌락을 주는 신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평안할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하나님의 뜻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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