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으러  온 자여 ( 2:1-23)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에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미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감사와 은혜의 고백을 올려 드리기 바랍니다. 복음 성가 찬양에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 편에 있는 주님의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참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성경엔 구약부터 신약까지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체로 성경의 위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뭔가를 이루는 게 보통이지요.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서 역사를 이뤘고, 모세도 미디안 광야로 가서 연단 받으며 지도자 수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아기 때 유다를 떠나 애굽으로 피신 가서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던 곳을 떠나 역사를 이룬 사례들은 거기에 하나님의 지시와 섭리가 있어서 였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자기 맘대로 떠난 게 아니라 구원 역사를 위해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 그 손길이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사례를 보면, 그런 하나님의 섭리와 비전 없이 자기들 스스로 판단해서, 자기들 좋자고 떠난 예가 있습니다. 즉 기도없이 어떤 일을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시는지요?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결정을 하시는지요? 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사모하고 인정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고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do not lean /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make straight(show you) your paths.

본문 1절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로 시작합니다.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친족이라는 사실은 3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마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나가기까지 나오미는 그녀에게 친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주변에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녀에게는 경작할 땅도 없었고 대를 이어줄 자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삶의 무게와 고통의 깊이는 없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룻은 베들레헴에서의 빈궁한 삶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1:22을 그녀가 베들레헴에 돌아올 때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고 밝히지만, 그녀에게 돌아올 분깃이라고는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오미에게"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나오미는 허락은 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것이 괜히 나를 따라와서는 생고생만 하는구나.'

그러나 본문은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 말하기 전까지 보아스가 누군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룻의 입장에서는 우연이 되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한 영혼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을 지난 주에 우리는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다 될 것인데 왜 우리가 구태여 나서고 발버둥치고 하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것인데, 왜 우리가 문제에 부딪히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기도만 하면 되지 않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고 자기의 의무를 약화시키는 일종의 불신앙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격적인 은혜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은혜스런 관계 속에서 부어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때 결코 우리의 의무가 약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더 적극적이 되고, 더 능동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룻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보리 추수할 시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누가 자기에게 보리 좀 갖다 주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는 어머니에게 요청해서, 내가 보리밭에 나가서 그 이삭을 줍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의사결정과 맞물려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합니다(6:8).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은 은혜의 각도가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하였더라."

단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노아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120년 동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세상의 조롱과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방주 만드는 일을 온전히 이루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삶을 살아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발견한 자의 삶의 특징입니다.

오늘 룻이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의심하는 불신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진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선진들은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수많은 증거들을 얻었습니다.

믿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기도는 움직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그 믿음대로 살아가고, 그 믿음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삶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삶에 지치고 더 이상 해답이 보이지 않는 분은 없으십니까? 오늘 룻도 그랬습니다.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울 그 어떤 해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황폐한 마음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진했습니다. 바로 그때 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저앉은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서는 자를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38). 뒤로 물러서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진하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십시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19:26) 믿음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왜 자꾸 뒤를 바라봅니까 ! 왜 자꾸 뒤를 바라봅니까 ! 혹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시나요? 나를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자꾸 머뭇거리는지? 그 뒤를 돌아보게 하는 끈을 이제 자르세요. 앞만 보고 믿음으로 걸어 가세요. 주님 보고 가세요. 말씀 붙잡고 가세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고백한 우리들 이잖아요. 

본문 4절은 보아스와 그의 종들과의 대화 속에서 상식적인 주종관계를 깨뜨리는 아름다운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여호와께서 복을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인사말에서 그들의 삶에 여호와 중심의 신앙이 굳게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인사도 신앙적으로 합니다. 

보아스는 보이지 않던 한 소녀를 발견합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중요한 만남입니다. 보아스와 룻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한 동역자로 만나게 됩니다. 룻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력한 친족이 되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니 만남의 축복도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베들레헴에서의 회복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회복의 은혜는 인간이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낙심해서 무너진 영혼들을 심방 해 보면 대부분 거꾸로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문제가 해결되면 그때 하나님께 나오겠다는 말을 합니다. 지금은 힘드니까 나오기 싫다는 것입니다. 회복되면 그때 하나님께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복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회복이 되는데, 회복이 되면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언제 회복이 된다는 말입니까?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오늘 룻이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를 만남으로 그녀는 인생의 해답을 찾게 됩니다. 문제의 출구를 발견하게 됩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이 만남으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푸는 은혜를 보기 바랍니다. 

 2:8-9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1)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2)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3)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4)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5) 자기 밭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함으로써 신변적 안전 6)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2:14-16을 보십시오. 7)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8)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9)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10)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11)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12) 베풀리 먹고 13)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으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14)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15)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고16) 책망하지 말라 또 17) 그를 위하여(온 마음이 룻에게, 온 마음이 우리에게 --> 주님의 마음이다) 18)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19) 줍게 하고 20) 꾸짖지 말라 

이것이 룻이 보아스로부터 받은 질적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로 얻는 양적 은혜가 얼마인가? 약 한 에바,  20리터, 15kg 이다. 이 정도면 두 여인이 몇 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다.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보라.  13장에 30, 60, 100배 라는 표현을 들어 보셨죠? 은혜의 점진적 성격을 이야기합니다. 찬송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세상 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없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노트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더 감동이 되는 부분은 보아스가 룻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모압여인에게 이런 은혜를 베푼 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를 지금 식사 자리에 함께 초대하지 않았는가? 모압 여인인데.. 예수님도 세리와 창기와 식사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자신의 식탁에 함께 앉히지 않았는가? 또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모양이라도요

그래서 그녀는 보아스의 발 밑에 엎드려 절하며 사례하였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2:10)”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고 은혜의 시작이다. 

23:3에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이 이스라엘 땅에 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녀에게 주어진 은혜는 너무나 과분한 은혜였습니다. 그녀는 왜 자기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오늘 룻기를 읽고, 지금 함께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께서 주신 이런 고백이 꿈틀거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 고백을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거늘 주님께서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언제쯤이나 알게 될까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가 나올까요? 언제쯤 빈손이 축복임을 알게 될까요? 

저는 서두에 룻기는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사 시대 백성들의 특징, '자기의 소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요?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 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 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우상으로 바뀌었느니라" 28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하매" 

 3장은 더 사실적으로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이게 바로 사사 시대요. 우리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저주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여인이, 본인은 자격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은혜를 입고,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룻의 고백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듣고 싶은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데, 저주 아래 놓은 자인데, 주여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1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누구의 하나님이시라고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는 하나님, 출애굽하신 그 하나님께 보호를 받으로 온 너, 오늘 우리가 이 예배에 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어서 온 것이 잖아요. 오늘 우리는 그래서 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놓아 주지 않으시고,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000, 내가 네게 온전한 상을 주노라 

우리 각자의 삶에 그 온전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아멘.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를 받으러 온 성도 여러분,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지쳤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합니까?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온전한 상, 온전한 은혜, 온전한 보호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룻이 움직이니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입합니다. 한 주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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