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의미 ( 4:13-22)

 

구원이란? 외부의 힘에 의하여 건짐 받고 치료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는 회복불능 상태로서 타자로부터 치료 받아야만 할 정도로 상처투성이로 놓여진 상태를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상태를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구원이 되려면 절망 가운데 놓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나 앉은뱅이나 중풍병자와 같은 갖가지 불치병들을 고쳐주신 것도 다 이러한 구원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잘 보여주는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살려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냥 죽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다 감당을 해 주어서 고쳐 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공짜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못에 물이 동한다고 하여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걸어 가라고 하십니다. 38년된 병자는 가만히 있다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죄인이 구원 받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 속에는 구원자와 구원 받아야 하는 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염치없이 주는 것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도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오미 라는 한 여인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룻이라는 여인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고 있습니다. 이 아들을 통해서 다윗 왕이 생기고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자신의 기업을 이어갈 아들을 얻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가정 야야기는 곧 우리들의 구원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곧 나오미처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도 잃어버리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로 인하여 잃어버려진 것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 주십니다. 어떻게 찾아 주시는가 하면 자신의 희생으로 찾아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희생으로 찾아진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를 계시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룻기도 구원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것" "찾아" 주는 이야기입니다. 룻기에서는 과부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이야기로 구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룐과 말룐, 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1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잃어 버린 드라크마를 찾습니다. 목자가 잃어 버린 양을 찾아서 집으로 데려갑니다. 아버지 집을 나가 살던 탕자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비유가 나옵니다. 위 세 가지 비유 모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구원이란? 주인이 잠시 잃어버려진 것을 다시 찾는 형식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찾느냐 하면 주인이 찾아요. 주인이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다 찾아내세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다고 온 방을 쓸고 닦고 하잖아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자 온 들과 산으로 찾아다니잖아요. 그리고 기어코 찾잖아요.

? 주인이 찾아다니는 줄 아세요. 그건 주인이 기쁘고 싶은 겁니다.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고서는 주인이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에요. 구원은 우리의 원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원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리고자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룻기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룻기는 비록 짧지만 그 속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진액처럼 담겨 있어요.

오늘 본문은 룻기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 끝이 납니다. 며느리가 낳은 아들을 시어머니가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다윗 가문의 족보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룻기가 다윗 왕가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1: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룻이 낳은 나오미의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짓습니다. 오벳이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과, “섬기는 자”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합해서 말하면 “여호와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 란 뜻입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는 섬기는 자이지만 우리 인간들에겐 구원자에요. 왕이란 말입니다. 그럼 여호와의 종으로 오셔서 섬기신 왕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룻기의 결론을 다윗 왕의 족보 이야기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것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 룻기의 끝을 다윗의 족보로 마치느냐! 그리고 왜? 나오미가 얻은 아들에 족보를 베레스로 시작을 하느냐! 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레스”가 누구인가 하면 다말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입니다. 베레스도 오벳처럼 없어야 하는 자인데 한 여인의 희생으로 있게 된 자입니다. 그러니 “없음에서”~~>“있음으로” 나아온 자들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창조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서 거듭났습니다. 바울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베레스가 어떻게 태어난 자인지 살펴봅시다. 베레스의 어미는 다말입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다말은 자신의 희생으로 유다 가문의 대()를 이어주는 자식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러니 다말은 룻과 같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한 가문을 자신의 희생으로 구한 여인입니다. 유다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과 혼인을 하고 엘과 오난과 셀라 라는 세 아들을 낳았어요. 유다는 알다시피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이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 백성이 비 언약 백성인 가나안 여자와 혼인을 한 것은 죄입니다. 거기서 얻어진 아들들은 모두가 죄 아래서 얻은 아들들이에요. 그러므로 유다의 가문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문에 다말이 큰 며느리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엘이라는 남편이 여호와 앞에 악하므로 갑자기 죽어 버립니다. 그러자 유다가 계대 결혼법으로 둘째 아들인 오난을 형수에게 들여보내서 대를 잇는 자식을 낳도록 합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수가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서 형수에게 씨를 주지 않고 땅에 설정해 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일이 악하다고 하여 대노하시고는 오난을 죽여 버립니다. 유다는 졸지에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계대 결혼법대로 라면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다말에게 주어서 자식을 생산하도록 하여야 하잖아요. 그러나 유다는 다말에게 들어가면 자식들이 죽어 나가자, 셋째 아들을 살리고자 다말을 친정으로 좇아버립니다.

이에 다말은 쫓겨 갑니다. 하지만 유다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자신을 버립니다. 스스로 창기가 됩니다. 창기로 변장하여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바로 베레스 입니다. 이 베레스가 유다 가문을 이어갑니다. 베레스는 다말이라는 여인의 희생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룻기에서 나오미의 가문을 이어주기 위하여 룻의 희생으로 낳은 아들인 오벳을 베레스의 계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이는 오벳이나 베레스나 같은 계통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다윗 왕도 이런 맥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맥으로 오십니다. 그러니 오벳 속에는 메시야의 맥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벳이나 베레스는 모두가 한 사람의 희생을 근거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없어야 할 자들인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 속에는 “없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없음의” 흐름 속에서 누가 나오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어요. 다윗의 왕 됨에는 “자격 없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이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자격 미달자를 왕으로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가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미달이에요. 이스라엘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민족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가 이 없음의 바탕 위에 세워졌어요. 이스라엘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이삭도 그랬잖아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면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됩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기 위해서 구원을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을 찬미케 하려고 구원의 바탕에 예수님의 희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그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게 되면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 됩니다. 이런 구원관은 이방인들의 구원관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입니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6: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라"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내 주체를 자랑하는 것은 예수와 떨어져 있는 독자적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몸에 부속된 존재란 뜻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자신을 위한 삶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도록 인도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입니다. 

그러니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어요. 예수님도 이러한 맥()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역사 속에서는 마리아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요셉의 실수가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는 것이죠..없어질 뻔해쬬..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우리를 구원합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구원을 합니다. 이걸 은혜라고 해요.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일컬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고 합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분을 위하여 산다” 고 합니다. 그러니 나는 날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이건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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