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적 방향 (막 1:14-15)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과 의미를 매일 새벽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은 우리이 인생의 최고의 행복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들여 오는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쓸어 내립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입니다. 천하보다 귀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런데 천하를 얻으려고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음으로 내 몰고 있으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모두 함께 기도를 드렸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이 잡힌 후에”로 시작합니다.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에 어떤 연속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메시야다”라고합니다. 실제로 그 뒤에 오셨습니다. 언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가 우연히 돌아가는 것 같지만, 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때’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초림 때처럼, 때가 차면 다시 오실 것입니다.그래서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에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

 

성경을 보면 어떤 일 후에, 혹은 그 일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일상을 볼 때,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와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쫓은 후,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난 후,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3)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난 후, 삼상 13:1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삶의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작은 순간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였으므로, 그의 사명이 완수된 이후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 본격적으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옥에 갇힌 후에야 비로서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구속사역의 질서를 이루어 가십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 이후로 400년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시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그 기간을 신구약중간시대, 침묵시대라고 합니다. 이때 세계역사는 격변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페르시아제국이 헬라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헬라는 알렉산더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은 이후 4개 제국으로 분열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게 됩니다. 주변 열강들의 판도가 달라질 때마다 이스라엘은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고난이 가중되면 될수록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약속되었던 메시야를 갈망하였습니다. 메시아가 곧 와서 억압받는 선민 이스라엘을 구해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람이 참 묘합니다. 조금이나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여유만 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암울했던 이스라엘 가운데 한줄기 빛이 비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선언은 마가복음 전체를 흐르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선언은, 당시의 그들에게 처한 상황에서 마땅히 듣고 싶었던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기쁜 소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더욱더 힘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고,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선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시고, 그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공적으로 전하기 위해 공신력이 있는 한 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습니다. 일상적인 옷을 벗어버리고,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광야에서 ‘소리’ 역할로서 진정한 ‘기쁜 소리, 복음’을 예비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워낙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 에스겔도 한 때 그랬습니다. 겔 3:11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으니까? 겔 5장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머리털과 수염을 깍아서 태우면서” 설교하라고 합니다. “인분을 딱딱하게 만들어서 불을 피워 빵을 만들어 먹으면서” 설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에스겔이 “하나님, 인분은 쫌...그래 쇠똥으로 한다” 그 정도로 당시에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하나님의 마음, 복음”을 전해줍니다. 그러면 또 그 소리냐고 가 버립니다. 오늘날도 뭐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이상한 옷 입고, 이상한 음식 먹으면서, 일상과는 다르게 살면서, 그는 백성들에게 죄를 사함받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기이한 세례 요한의 행적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조차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기 위해 몰려왔고, 그에게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에스겔 때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이죠. 

 

그만큼 갈급했던 것입니다. 은혜는 누가 받느냐면, 갈급한 영혼들이더라구요. 시 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arag:100m 급하게 달리고 마친 선수의 호흡처럼 갈급한 상황]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런 우리들의 습성을 잘 아셔서 그런지, 갈급한 상태까지 가만히 나두는 경우도 많으십니다.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문드리라” 해도, 갈급하지 않으면 관심 없더라구요. 갈급해지면요. 논도 갈라지면 물 채우려면 한 참 걸립니다. 

 

요한은 삶의 방향이었고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요한의 삶의 방향은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의 삶의 끝은 주님을 가리키고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는 자유가 부른 복음 성가 중에 “소원”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 나의 작음을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 소망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 내가 아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 내가 노래하듯이 또 네가 얘기하듯이 / 살 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 삶의 한절이라도 그 분을 닮길 원하네 /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x3)

 

이 예수님께서 요한의 바톤을 받아서 전파하신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것입니다. 이것은 구약내내 하나님께서 하셨던 내용들입니다. 노아,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다윗..등이 했던 내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전해 주시는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단어와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 속한 복음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지겨워해도 이 소리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다른 복음을 들으면 안 됩니다. 갈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은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니까 다른 복음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입니다. The main content of good news is Jesus. 예수님이 왜 복음이냐면, 우리가 하나님께 실패한 그 자리,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그 자리를 주님께서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 버리고 참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그분께서 승리하신 ‘생명’을 거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한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신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할렐루야.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그토록 고통 가운데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과 결과 자체가 ‘고통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Repent, Believe the Gospel (Jesus) = Rely on Jesus, not oneself. 

 

회개는 무슨 뜻입니까? 흔히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입니다. ‘메타노이아’에서 ‘메타’는 ‘다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노이아’는 ‘생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회개를 원문 그대로 풀어 보면 ‘다르게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는것입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주려 죽는구나”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외식하는 자’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유대교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통적이고 습관적인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 3:9절을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이방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만을 의식해서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 했을 뿐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라고 선포한 것은 이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바로 나의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내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키지 속에 있는 속성들입니다. 회개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신뢰의 대상(예, 자기 자신)에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으라는 것은 신앙의 대상에 전심으로 자신을 헌신, 의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믿음은 분리가 안 되며 동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출발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복음의 참 내용이신 예수님을 의존, 즉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성경대로 하지 않고,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그 진짜, 참, 복음의 진짜 내용인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