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구속사 ( 1:12-13)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광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시험을 받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예수님이 어렵고 곤궁할 때, 그 약점을 비집고 사탄이 덤벼든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어 사탄 앞에 시험을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이신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삶을 통해,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자주 읽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적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그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사탄이 등장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장을 인용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구속사역입니다. 즉 죄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을 준비하여 그리로 보내듯이 우리 구원은 아담 안에서 죄 아래 있는 우리의 처지를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꺼내어 새로운 인류, 하나님과 화목 되고 인정받는 자리로 데려가시는 원대한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5:17-19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음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위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아담을 대표로 하여 그 안에 그 후손으로 신분이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인 죄인으로서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메시야의 직분으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아담이라는 대표자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 아래 있는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새 인류의 대표자로서 이 일을 우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이고 오늘 시험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을 우리도 받고 이겨 내야한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시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그 절차를 그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복하시며, 성취하시며,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했던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죄가 없으신 분이 사람의 형상으로 즉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구약의 홍해사건이 상징하는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밟은 첫 땅이 광야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세례 이후에 첫 장소가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이 시험의 내용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 생활 속에서 받은 시험의 내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기록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시험의 본질적인 초점이 무엇인지를 신약과 구약을 연결하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의 아들이 할 사역이 이미 구약에 계시되어 있거든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왜 이 분을 의지해야 하는지, 그분의 사역이 왜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험을 통과해야겠다고 다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못합니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인본주의자이고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로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삽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여기에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2절에 이 사십 년 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보면, 이 사십 년 광야 생활이 너를 낮추고 너를 시험하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려 했다고 합니다. 보다 정확한 것은 마음의 상태를 드러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너를 낮추고 주리게 하여 만나를 먹임으로써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설명하고 있는 이 내용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사건이 출 16장에 나옵니다. 왜 광야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려움 없이 사는 법 즉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광야생활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살아남는 길은 외부에서 광야 밖에서 은혜가 흘러 와야 합니다. 

 

우리가 알 듯이,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온 직후 백성들의 첫 번째 불만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불평입니다. 그러나 출 16:1-4절까지 자세히 보면, 다만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하는 불평은 아닙니다. 4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불평 속에는 배가 고픕니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범죄 합니다라는 핑계가 숨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신앙을 지키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못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질문 드립니다. 각자 자신의 상황에 맞는 답을 속으로 답해 보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이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적인 조건에 있는 것입니까? 환경 때문입니까? 내 마음의 상태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의롭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 원래 우리의 마음이지만 배가 고파서 범죄하지 배부르면 죄 안 짓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이 먹을 것이 없어서 그들이 범죄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대답은 너희가 배부른 다음에도 내 말을 지키는가 범죄 하는가 한 번 보자 해서 신명기 8장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8장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이 확인되었습니까?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보여준 인간은, 죄 짓는 이유가 외적인 조건에 있다고 우겨 된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착한데 외적 조건이 나빠서 할 수 없이 범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죄의 원인이 환경과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들의 운명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죠. 들어가는 것 때문에 나쁜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너희 마음이 나쁘다고요. 회칠한 무덤이고 로마서는 썩은 무덤이라고요. 

 

모든 인간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에너지만 공급이 되면 우리는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장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면 죄만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고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진정한 생명의 원천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 떡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사탄의 질문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아담에게 했던 질문이나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아담에게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에게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시험하느냐면, 먹는 것가지고입니다. 먹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선악과사건 ! 이것은 인간이 모든 삶속에서 절대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금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최종 권위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순복함으로써만 자신의 지위와 내용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절대적 권위를 넘어선 것이 아담의 타락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합니다. 온유라고 하는 Praus는 야생말을 길들인 다음에, 프루우스라 부르고 전투마로서 사용했습니다. 이 프라우스의 특징은 주인의 말을 듣고 화살이 날아오는 적진까지 달리는 것이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야생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말에 그 마음대로 control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의 본의다. 통제된 능력 힘이 없어서 빌빌대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주권 속에서만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질서 안에서만 통제된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온유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연의 자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 자리를 넘어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이라고 합니다. 천사의 타락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의 열매 중에 온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Meek, Mild 해지는 이유가, 충분히 화 낼 수 있지고 싸울 수 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화목하라고 말씀하니까, 힘을 안 쓰는 것입니다.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오늘 시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그 시험에서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질서 아래 자신을 복종시킴으로써 인간의 참다운 지위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복락들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선포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실패자요, 죄 아래 있고 형벌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자리,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의 규례를 지킴으로써 인간의 참된 내용과 복을 누리는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알고 배우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 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생의 선물로 인해 기뻐하며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돌로 만든 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빵으로 오신 생명의 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을 참여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누리십니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