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 2:19-30)

 

 

오늘 저는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그 만남으로 인해 복음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자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이처럼 끈끈한 관계로 발전하게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해야 하는지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먼저, 

1.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했던 곳을 돌아보자고 합의는 했지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갈라선 후에 바나바와 마가가 먼저 구브로로 떠나자 바울과 실라는 거꾸로 더베와 루스드라를 먼저 방문하게 됩니다“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1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디모데”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디모데는 어떤 관계였을까요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전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딤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믿음 안에서 아들처럼 여겼습니다참으로 소중한 관계입니다. 딤후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서로 보고 싶은 관계,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입니다. 사람은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관계론의 대가인 데일 카네기의 표현은 참으로 귀합니다. “꿀을 얻기 원한다면 벌통을 걷어 차지 마라

 

바울과 디메데의 만남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만남도 서로에게 이처럼 소중한 관계로 발전시켜 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실천 과제는 서로를 비난하거나, 불평하면 안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2.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사도 바울을 무척 아끼고 존경하는 빌립보 교회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그를 위하여 사랑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4장에서 나오겠습니다마는, 사랑이란 마음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있으면 행동이 따라야 하고 시간도 서로 맞아야 합니다. 시간과 형편이 잘 맞아서 서로 응답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기회를 잘 포착하지 못하면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을 바로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사람은 뭐 늘 감옥에 들락 날락하는 사람이니까……'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순교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후까지 가능한 한 그를 돕고 싶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사랑은 참으로 귀감이 됩니다. 마음을 쓰고 근심하고 기도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을 물질로 섬기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목사 편에 보냅니다. 도움을 주려고 하는 빌립보 교회의 마음이 참으로 귀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그 물질을 전달하려고 먼 길을 나서는 에바브로디도의 결심 역시 귀한 것입니다. 오늘날과 달라서 당시에 전달을 하려면 직접 가야 했습니다. 가까운 길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 훌륭한 교회요,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능동적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 사랑을 가지고 갈 사람입니다. 아무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비상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침 에바브로디도는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사도 바울을 돕기 위해 갑니다. 

 

빌립보 교회가 아무리 바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해도 그 정성을 전달할 사람이 없다면 이 사랑은 무효이며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한데 에바브로디도가 자원한 것입니다. 이런 사연들을 통해서 바울과 에바브로디도는 서로에 대해서 깊은 신뢰와 사랑이 확인됩니다. 복음 때문에요. 

 

첫째,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거듭난 교인은 서로 형제요, 기본적으로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됩니다. 여기에 누가 높고 낮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연령으로 보나 신앙 연조로 보나 모든 것이 에바브로디도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에바브로디도를 자신의 형제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은 낮춘 것이요, 에바브로디도는 높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아버지"라 부릅니다. 다 같은 형제 자매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가리켜,  2:19 “하나님의 권속이라, 즉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동역자를 뜻합니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함께 수고하는 것입니다. 질적으로는 똑같고 기능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하고, 어떤 사람은 성가대에서 서서 찬양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주일 아침 교회에 나와 기도할 때마다 생각을 합니다. 제가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것입니까? 성가대원이 있고, 주일학교 교사가 있고, 안내 위원, 헌금 위원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많은 교인의 봉사로 우리 교회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예배드릴 때마다 오늘도 봉사하는 이 많은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게 하며 그 수고가 하나님께 기억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수고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퍼전(Rev. Spurgeon) 목사가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인 중에 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주일 날 교회에 나올 때마다 언제나 그날 새로 등록한 새가족 명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또 모든 시험을 이기도록 새벽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기도를 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스퍼전 목사는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그는 나의 가장 훌륭한 동역자였습니다" 하고 밝혔습니다. 교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큰 동역입니다. 새로 믿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목회자에게는 큰 동역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이 위대한 동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사람 보기에는 작은 일 같아도 하나님께는 그 중심을 보시고 다 큰 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장, 권찰 그리고 교사들이 그 구역의 교인들을 위해, 어려운 문제를 당한 교인의 이름을 부르며 차례 차례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목회자의 큰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매주 새벽마다, 기도회때마다 함께 기도하는 여러분은 진정한 동역자입니다. 

 

셋째, '함께 군사된 자'라 합니다. 이것은 전우애적(戰友愛的)인 표현입니다. 군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쳐 일하는 사람입니다. 함께 핍박받고 함께 매맞고 고생하며 생명의 위협을 참고 분투하는 사람입니다. 군인은 사사로운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오직 나라를 위한 충성 한가지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군인은 죽도록 수고하고 상은 대장이 받습니다. 병사들은 죽도록 수고하나 큰 상은 받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군인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고 함께 수고하는 군사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서, 특히 생사가 달려 있는 큰위기 상황 속에서 사귄 친구야말로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함께 봉사하고, 주일 친교를 위해서 서로 칼질을 하고 설것이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소중함을 함께 경험합니다. 

 

넷째,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감옥까지 가지고 가서 바울이 필요한 것을 필요한 시간에 조달받을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그 먼거리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에바브로디도는 가기를 기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도 감옥에 있는 바울을 생각하며 사랑으로 필요한 것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감옥에 갇힌 사람한테 많은 돈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 돈으로 차를 사겠습니까, 집을 사겠습니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심입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실천 과제를 드립니다. 구역식구들끼리 서로 관심을 가지고 한 주간 카톡으로 전화로 안부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저가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헬라어 표현은 이렇습니다. '파라볼류 에스다이', 본래'파라' '곁으로' 라는 말이고 '발로우' '던진다' 말로, '곁으로 던진다' 뜻입니다. 

 

이말은 도박 용어입니다. 도박사들이 모험을 걸고 주사위를 던지고 거기에다 자기 돈의 전부를 거는 , 이것이 바로 '돌아 보는 '입니다. 결국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예수님께 전부 걸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넘어선  모험입니다. 마치 도박사가 주사위에 많은 돈을  듯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모습은 에바브로디도만이 아닙니다. 바울도, 디모데도 같았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정신을 가졌기에 이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할렐루야 ~ 오늘 우리 역시 복음을 위해, 나의 것을 것을 조금 양보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극적인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에바브로디도가 지금 병들었습니다. 이를위하여 모두가 기도하는 장면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바울로서는  젊은 목사가 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병들어 죽는다면  얼마나 죄송한 일입니까? 에바브로디도한테는 물론이려니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도 미안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물론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할 수도 있지만 바울을 위해 왔다가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이 바울에게는 굉장히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그가  일로 죽지 않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 교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괴로울까, 여기까지 와서 바울에게  짐을주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생각을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서  때에는 자기 죽는 것은 걱정거리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가 죽는다면 절반은 순교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은 상관없는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바울 선생님이 얼마나 괴로울까, 빌립보 교인들한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그런 것이 걱정됩니다. 복음을 위해 일하다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믿음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신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보다도, 바울과빌립보 교회를 위해 괴로워합니다. 

 

또 교회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바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는데 그가 거기서 죽는다면   주러 갔다가  붙여 주는 격이요, 오히려 바울의 마음을 무겁게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회대로 바울과 에바브로디도를 걱정합니다. 서로가 자기 걱정은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만을 걱정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서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어여삐 여기셨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어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제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 보내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서로의 소중함을 알고, 내 일처럼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기도제목을 내어 놓고 눈물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말입니다. 우리 이런 교회 함께 만들어 갑시다. 

어떤 사람이 바지를 샀는데 너무 길어서 부인한테  치만 줄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어린아이  먹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바지를 가져다 치를 줄이고는 살그머니 돌려 놓았습니다. 잠시  시누이가 보니까 아이구 언니가 바지는줄이지 않고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져다가  치를  줄여 놓았습니다. 마침내 며느리가잠에서 깨었습니다. 하마터면 바지 줄이는 것을 잊을 뻔했다고 바지를    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바지를 입어 보니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짧은 바지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각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염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회가 서로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관심을 갖고 서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겨 주는 복된 관계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이미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수를 놓고 엮어 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서로를 향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 오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도 외롭습니다. ㅎㅎ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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