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레테! 우리 기뻐합시다 !! ( 4:4)

 

오늘 설교제목을 보시고 여러분은 가장 먼저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아마도 ‘말이야 옳지만 어떻게 기쁠 일이 없는데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설교주제를 정해놓고 꽤 갈등을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저와 여러분 다 7월달의 남은 주를 늘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라는 곳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역사적 장소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의 일이었지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시아를 떠나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게 되는데, 바로 그 첫 번째 지방의 첫 번째 성이 빌립보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도시였고, 거기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점쟁이 소녀,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가는 데 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니 빌립보에도 교회가 세워졌겠지요? 바울로서는 유럽의 첫 번째 사역지니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각별했던 것은, 바울이 그곳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거기까지 두 차례나 쓸 것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했지만,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특별한 사정을 알았는지 선물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당시 빌립보 교인들이 처해 있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위로하고 권고했던 겁니다. 아울러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과 빌립보 교인들의 처지를 동일시하면서 한 가지 간곡하게 권유하는데, 바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닥치고 있는 현실이 어려워서 그렇지 사실 인생의 긴 시간을 통틀어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쁠 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역설 같지만 기뻐하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영어로 ‘in spite of’의 기쁨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기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누려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바울의 현재 상황을 웬만큼 알고 넘어가는 게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가장 먼저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서 서두에 보면 ‘나의 매임’이란 말이 나오는데, ‘매임’의 원어의 의미는 ‘끈으로 묶었다’, ‘손과 발을 족쇄로 채웠다’, ‘올가미로 씌웠다’ 는 뜻입니다. 즉 감옥에 갇혀서 옴짝 달싹 못하는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빌2:18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러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뭔가 하니,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12 말씀대로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어서라는 거지요. 이따 다시 말씀 드리겠지만 하루 종일 옥에 갇혀 있게 되니까 자기를 지키는 병사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되고 거기서 생각도 못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오히려 그 모든 불안한 환경도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재판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그 즈음엔 이미 상황이 나빠져서 사형선고가 확실시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기뻐했던 것은 그의 고백대로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면 그 나머지 것은 어떻게 되든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생애에 유일한 관심사는 자기 목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느냐 아니냐 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기쁨을 쾌락과 희락,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육신적인 기쁨을 말하고 희락은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기쁨은 만들어 낼 수 있어도 영적인 기쁨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기쁨은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셨을 겁니다. 거기 보면 네로황제 치하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핍박을 당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큰 원형경기장에다가 기독교인들을 끌어다 놓고는 사자들을 풀어 놓습니다. 모두 다 물려 죽고 찢겨 죽고 하면서 사자들의 밥으로 그들 삶이 끝납니다. 나중에 네로황제가 그 모습을 보러 경기장으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시체들을 보면서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얘기를 하지요? 그 죽은 시체들이 다 웃음을 머금고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죽어간 거예요. 그걸 보더니 네로황제가 더 화를 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 때문에 죽는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기쁨을 이미 우리에게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기쁨이 없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잊었거나 실천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기쁨이 올까요? 어떨 때 우리는 기뻐지는 걸까요? 

 

첫째는,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 기쁨이 옵니다. 

 

아기들은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아기들의 삶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아기들은 엄마나 아빠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어른들은 하루에 평균 15번을 웃는데, 아기들은 하루에 평균 4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표현하는 거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경은 많은 얘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신 겁니다. 정말 성경 한 장 한 장을 펼 때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장도 사랑한다, 한 장 넘기면 거기도 또 너를 사랑한다, 그 다음 장을 넘겨도 계속해서 사랑한다 그러면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호세아 읽게 되면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기억해 내야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거기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 하는 대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받고 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애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기쁨은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행복은 다릅니다. 기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은 일에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여전히 그 불행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유 때문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사랑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그 사랑 받는 존재로서의 기쁨을 항상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소중합니까?

 

워싱턴 D.C의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에는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인도산인 45캐럿짜리 이 다이아몬드의 이름은 ‘호프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런데 이 보석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저주의 보석’이라고 불리지요. 원래 이 보석의 소유자는 페르시아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총독은 보석을 도둑에게 빼앗기고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소유자는 페르시아의 왕이었는데 그도 역시 반란군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이 보석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넘겨졌지만, 그 왕도 그것을 단 한 번 목에 걸어봤을 뿐,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보석은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인 마리 앙뜨와네뜨에게 물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이 보석을 소유했던 사람은 누구랄 것 없이 다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결국 이 보석은 영국의 최고 재벌인 헨리 필립 호프에게 넘어가서 ‘호프 다이아몬드’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저주의 다이아몬드가 희망의 보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붙여‘호프 다이아몬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호프가도 몰락하고 말지요. 그 후로 이 최고의 다이아몬드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최고로 사람을 기쁘게 해 줄 것 같았고, 최고로 행복을 줄줄 알았던 다이아몬드가 최악의 불행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물질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을 복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몇 년 전 미국 100대 기업의 총수들에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그런 설문을 내놨을 때, 응답자의 87%가 “아니오! 나는 불행합니다” 라는 대답을 내 놨다고 합니다. 물질의 소유는 기쁨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저주가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즉 잠 30:8 처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기도를 계속 하라고 권유하셨던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고( 6:17), 그 분은 우리 각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그가 소유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빌 3:7-8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예수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얻었고, 예수님을 소유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만큼 이 세상에서 소중한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만큼 우리에게 복이 되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때문에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를 발견하자마자, 이 예수를 소유하게 되자마자 그의 마음 속에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것으로부터 오는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발견하여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받아 누리는 은혜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이 험한 세상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 받는다는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누구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바울은 기뻐한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호프 다이아는 저주의 다이아로 사람을 망하게 했지만, 우리의 진정한 소망, 호프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시는 진짜 호프 다이아이십니다. 가장 소중한 예수를 소유했다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 줄 때 기쁨이 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가 소유한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예수를 나누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8절에서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중죄수이기 때문에 그 옆에는 하루 종일 감시를 하는 간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루 종일 바울과 같이 있는 그 젊은 엘리트들을 바울이 가만히 뒀겠습니까? 하루 종일 예수님 얘기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교대를 하면 또 그 사람에게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1:13-14절 같은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우리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몰라요. 그러니 지금 우리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맙시다. 오히려 기뻐하십시다. 

 

이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도 바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황제의 가까운 지인들이 변하게 되면서 로마가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던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누어 줍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기뻐할 수 있을까를 알았다 해서 우리가 기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명령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 ‘기뻐하라’의 헬라어 원어는 ‘카이레테’라는 말인데, 이것은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기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의지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지요. 그것은 다르게 말씀 드리면 기쁨을 선택하라는 말도 됩니다. 즉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를 갖고 살 수도 있고, 감사하고 기뻐할 이유를 갖고 살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해서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하면 반드시 그 선택된 것이 내 손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야.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어’ 하면서 기쁨을 선택하기로 하면, 그 기쁨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도 안 하고 자연적으로 기쁨이 굴러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로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했으므로 ‘주여, 알겠습니다!’ 하고 기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형편을 하나님이 알아서 주신 것이니까 선한 거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쁨을 선택하면, 그 기쁨은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있지 마시고, 기쁨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현재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기쁨의 조건들이 당장 없다해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한 계획과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합시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주 안에서 항상 언제든지 기뻐합시다. 어느 환경, 어느 조건 아래서도 여러분이 기뻐하시기로 작정하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기쁨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다같이 오늘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외쳐 볼까요? “카이레테 !! ”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호프 다이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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