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전전하는 사람 ( 7:19-22)

 

관점이 바뀌면 최선을 다해 준비할 뿐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돌격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기드온은 최선을 다해 준비한 뒤에 믿음으로 돌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 ‘이경 초’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중간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 말 성경은 시간으로 보아서 이경 초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시간은 아마도 모든 병사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11정도가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히브리 원문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번병들이 교대한 후에 경계업무를 시작하는 중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군개가 적진 가까이에 도착하자 적의 보초가 서로 교대할 시간이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차 공격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의 것과 최선의 시기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때에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최선의 상황이며, 최선의 시기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서 지금 뭔가 분명히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나보다 더 분명한 때와 방법을 알고 계시며 그렇게 인도하시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만 따라 갈 줄 아는 simple faith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전쟁에서는 야밤에 기습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습니다. 7:20을 보십시오. 기드온의 부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리자 다른 모든 부대원들도 동시에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렸습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선두 부대가 항아리를 깨뜨리지 않았는데 먼저 깨뜨려서도 안 되고, 선두 부대가 항아리를 깨뜨렸는데도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망설이거나 주저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그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과 지혜를 철저히 배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55:8 이는 나의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 전에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슈브, 회개]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슈브, 회개]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돌아오라는 말씀 즉 방향을 돌리라는 말씀은 방향이 틀어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그런 방향이 틀어진 모습을 사 1:29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30절에서는 그 동산이 이 없는 동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 최초의 동산이 어디인가?  2:10절의 에덴 동산 즉 기쁨의 동산 / 아단: 자신을 기쁘게 하다. 사치스러운, 호사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다이다. 에덴이 기쁨의 동산인 것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동산이 기쁨의 동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순간, 그 동산의 기쁨의 동산이 아니라, 기쁨이 없는, 아니 물이 없는 동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늘 갈급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에덴에는 이 있었다. 그래서  2:10에서는 강의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셨다고 한다. 그런데 타락후 어찌 되었는가? 인류는 물을 찾아 문명을 건설했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지는 물근처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애굽인들이 나일강을 신으로 섬긴 이유는 바로 타락한 인류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그 애굽의 물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꺼내 오셨고, 반석에서 물을 먹이셨고, 47장에서는 진짜 물이 어디서 오는지를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이셨다.  47:1 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환성을 보이신다. 계시록 22장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어떤 곳이 성전인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에덴은 그런 측면에서 최초의 성전이었던 것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필요한 물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물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4장에서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이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타락 후 아담과 하와가 갈구 했던 그 생명나무와 같지 않은가!!

 

그래서 이사야는 58 11절에 여호와와 함께 하는 이스라엘의 삶을 이렇게 예언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예레미야도 31 12절에 여호와의 복을 이야기 하면서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라고 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읽으면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복으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등지고, 애굽 즉 세상을 따라 사는 자는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이니라

 

그러므로 진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으로 우리는 만족한다고 합니다. 우상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즉 내 복들의 이미지화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진짜 복은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 내 복들을 없애고 하나님의 복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도려 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41:28-29 내가 우상을 둘러 보았다. 그들 가운데 말하는 우상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우상도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였다. 보아라, 이 모든 우상은 쓸모가 없으며, 그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이다

 

 42:8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공격하는 이스라엘 군대는 단 한명도 칼을 들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칼은 단지 미디안 군인들의 손에만 들려있었는데, 그들은 그 칼을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그의 이름을 적군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 약점을 이용하여 그의 이름을 외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없이는 그의 이름이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할때 아무리 자신감이 있어도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조금 잘 된다 싶으면, 자신의 능력으로 잘 된다 싶으면,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이 때가 가장 조심할 때입니다. 부인되어야 할 내가 꿈틀거리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인간은 그 도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며, 인간은 크든 작든 모두가 하나님의 종입니다.적군은 두려움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으며, 그들이 패배한 것은 특히 “여호와의 칼날”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손에 칼을 들지 않고 ‘칼’이란 말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힘과 인간의 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잘 합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아니면, “여기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고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즉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힘을 구분해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해서 구분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본문에도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에 칼은 오직 한 자루뿐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최선은 구분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도우셔야 합니다. (인간 100% + 하나님 100% = 100%)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이자 동역자입니다. 

 

벧후 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원문에 ‘qei,aj koinwnoi. fu,sewj(테이아스 코이노노이 푸세오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뜻으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주시는 은혜가 너무 큽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습니까?  2:1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라고 합니다.  2:3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2:4-10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여겨 주시는 은혜,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무엇이간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시에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함 마음과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내 능력만으로 되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함께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각기 당처에 서라”라는 말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적진을 둘러 싼 채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적진을 포위한 채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적진에서는 아우성이 나서 달아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그들은 미디안의 처소로 뛰어들어가 탐욕스럽게 적군의 피를 묻히거나 그들을 약탈하지 않고 단지 침착하게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장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것은 홍해 바닷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14:13) 그래서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배후에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르드개의 운명 뒤에서 보이지 않지만, 역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세상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만의 자만심 뒤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똑똑히 보여 주는 책이 바로 에스더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안계시겠지 하지 마십시요. 우리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십니다.  1:2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그러나 요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매 즉 물고기 뱃속에서도 요나의 기도를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 다시 돌아와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것도 단 한번의 전투도 없이 승리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싸울 필요가 없이 단지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미디안 진영의 아비규환의 모습은 세 가지 동사로 묘사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달렸고, 비명을 질렀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미디안 진영에서의 이러한 대혼란의 원인을 22절에서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역사하셨다는 것입니.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주님께서…” 300명이 나팔을 불 때라는 것은, 그들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에 순종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길입니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승리를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3: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삿 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되었으면 믿음으로 돌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을 때 연약한 가운데도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돌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합니다.  2:2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 말씀을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라, 마음이 교만한 자는 그것이 보이지 않으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 감격과 능력을 통해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인간은 큰 변화를 겪게 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삶과 믿음으로 돌격하는 삶은 이때부터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배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의 세속에 물든 관점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시선교정입니다. 기드온이 처음 부름 받을 때 연약했지만, 믿었을때는 담대하게 합니다. 이런 믿음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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