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의 힘의 근원: 거룩이 능력이다: 영성을 갉아 먹는 0.1를 제거하라 (삿 16:7-17)

 

 

0.1%는 그 양이나 수적인 면에서 볼때, 그리 많은 양이나 수는 아닙니다. 사울은 그 0.1% 때문에 영적 감각과 양심을 잃어버려 악령의 충만을 받아 짐승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했던 그 0.1% 때문에 우리의 영성이 내리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삼손도 잠시 세상을 즐기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생긴 골프장의 구멍처럼 점점 그의 인생을 갉아 먹고 있다는 점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가 거대한 댐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0.1%를 무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내리막 길로 치닫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함 (4절) : 들릴라를 만남

“이 후에”라는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삼손이 세상을 즐겨도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까? 이번에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이번에는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에 푹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가 무시했던 그 0.1%때문에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골짜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와디”라는 곳입니다. 와디란 바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계곡이 되고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통로가 되는 긴 골짜기를 의미합니다. 소렉 골짜기는 삼손이 살고 있던 소라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들릴라라는 이름을 특별히 밝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들릴라라는 말의 뜻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밤의 여인’이라는 뜻인데 ‘작은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삼손과는 대조적인 이름입니다. ‘밤의 여인’이 ‘작은 태양’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둘째는 ‘매달리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은 ‘끝까지 매달려서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을 삼손이 사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단지 세상을 즐기려고만 했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신앙생활도 하면서, 세상도 즐기면서 그렇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깊이 세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 지금 당장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유혹과 거짓말고 그녀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와의 눈에 선악과가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즉 ‘생각의 변화’를 준것이죠. 생각의 변화는 바로 행동의 변화로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일치하는 말은 잘 듣고, 마음과 맞지 않는 말은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들으나 안들은 것이나 다름없죠. 

만약 마귀가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을 떠나라고 한다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한 사람도 떠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이런 방해가 온다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절대 그런 식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것,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좋지만 이런 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일 먼저 시험한 방법이었습니다. 이 돌돌 떡을 만들어 먹으라. 사람이 어떻게 떡 없이 살 수 있느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떡이 필요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떡이 필요한데, 그 떡을 마구의 말을 들으면서까지 얻을 생각은 없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떡은 마귀와 세상의 말을 들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세상과 마귀의 말을 들으면서 얻지 않겠다는 단호한 믿음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며 살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깊이 빠지지도 않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공격에 노출됨 (5-14) : 들릴라의 본격적인 유혹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한다는 소식을 알고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모두 모여 그 여인을 찾아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 0.1%를 마귀는 아주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기회를 노려서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것입니다. 벧전 5:8을 기억하십시오. 기회만 있으면 마귀는 우리 주변에 유혹의 사탕을 뿌립니다. 신앙이 어리면 분별력이 떨어져 그 사탕 먹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탕이 맛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 여인에게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합니다. 그들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서 그 힘을 제거하지 않는 한 절대 삼솜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슈퍼맨을 보셨습니까? 슈퍼맨을 보시면 크립토나이트라는 물질을 가까이 가져가면 슈퍼맨이 보통맨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손에게 있는 그 힘이 단순히 인간의 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힘을 제거할 수 있는 크립토나이트를 찾아내라는 지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개씩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블레셋 방백이 5명이었으니 총 5,500개나 되겠습니다. 사사기 17:10을 보시면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연봉이 은 10개였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550명의 제사장의 연봉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당시 최저 연봉을 연 2,000만원으로 잡아도 110억원 정도의 돈이 됩니다. 이것으로 로또 당첨이 5번 정도 연이어 터진 정도의 대박입니다. 그래서 들릴라는 전혀 갈등하지 않고 즉시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와도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창 3:5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God” 얼마나 놀라운 제안입니까? 

들릴라는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녀는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으면 큰 힘이 생기는 것처럼 삼손에게도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삼손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의심스럽게 여겼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도 그렇습니다. 모릅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겸손이라고 하지만 모릅니다.) 청년들에게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눈’이 높습니다.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은 죄”라고 합니다. 눈이 높은 것도 죄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적국의 땅에서 사귄 여성이 자기 힘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결박하여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은행의 보안 직원에게 새로 사귄 여자 친구가 은행의 보안 시스템을 해제할 수 있는 비밀과 출입할 수 있는 카드번호를 내가 알려 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곧 바로 이상한 눈치를 채고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정확한 이유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7, 11, 1317(결과) 열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없다는 속담이 솜손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삼손은 세 번이나 들리라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신자로서 제 9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말을 듣자 들릴라는 그대로 합니다. 혈안이 되어 있죠. 왜 그렇습니까? 돈때문입니다. “억, 억, 억” 

아마도 삼손의 머리를 다 짤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작업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릴라는 그 놈의 ‘돈’때문에, ‘돈’이 무엇이길래…삼손이 잠든 틈을 이용해 삼손의 머리를 단단히 짰습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듭니다. 오늘날도 그렇죠. 저 교회, 목사, 신자를 어떻게 죽일까? 생각하고 난 다음, 전화기를 들죠, 전화번호 찾아서” 들릴라의 집요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을 무너뜨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니다. 사탄도 그렇습니다. 교회, 목사, 교회 리더, 신자를 무너뜨리려고 집요하게 덤벼듭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의 고생은 완전히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속임수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너무 위험스러울 정도로 진실에 가까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에 대해 언급을 했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요? 아마 자기가 강하기 때문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과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삼손은 이러다가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줄을 물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삼손은 단지 세상을 즐기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을 즐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데까지 갔습니다. 이런 삼손을 세상이 그냥 나둘까요? 본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엄청난 금액을 걸었고, 들릴라는 세번씩이나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분명한 믿음의 자세를 잃어버리면 세상은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주변에 서성거리다가 허점이 보이면 여지없이 달라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분명한 믿음의 자세를 잃어 버리고 세상을 즐기며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세상의 표적, 마귀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삼손 (15-17)

들릴라가 여기에서 중단하지 않고 삼손의 사랑하는 마음을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힘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세요.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이것은 삿 14:17절에도 있었던 경험입니다. 

여자가 이렇게까지 하니 삼손이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지키자니 하나님을 배반해야 하고, 하나님을 따르자니 사랑을 포기해야 하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고민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수 24:15 “하나님이 좋거든 하나님하고, 이방신들이 좋거든 이방신으로 하라. 선택해라” 

죄의 유혹은 이처럼 끈질긴 것이빈다. 삼손이 무너지는 것은 그에게 힘과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들릴라의 끊임없는 유혹때문에 그만 넘어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문학적으로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풀 정도로 지적인 능력이 있던 삼손이 여기서는 매우 어리석과 우둔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미혹의 영이 역사하면 영리하던 사람도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괴로우면 그 자리를 떠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셉처럼요.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번뇌하여 죽을 지경까지 되어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처음부터 분별하고 단호하게 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흠담하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듣다 보면, 우리의 영이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침체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예수님 자랑, 교회 자랑, 목사자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도 동일하게 이것을 이용합니다. 예수님 흠담, 교회 흠담, 목사흠담..그러니 예수님 흠담, 교회 흠담, 목사흠담하는 사람은 이미 마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드디어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삼손은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자기 머리를 자르면 힘이 없어질까요?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블레셋 사람들처럼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머리를 자른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삼손에게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던 것은 여호와의 영이 임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 때문에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건 삼손의 착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를 자르니까 정말 삼손의 힘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건 또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삼손에게 있어서 머리는 나실인의 마지막 보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는 나실인이 지켜야 할 것 중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어기고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시체를 함부로 만지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이방 여자를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었던 것이 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마지막 남은 나실인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나실인의 삶을 제대로 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 머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삼손이 이걸 포기함으로 이젠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이걸로 보아서 삼손은 하나님의 나실인의 길이냐 들릴라와 함께 사는 길이냐의 선택에서 들릴라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명을 포기한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더 이상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줄 필요도 없구요. 그래서 20절에 하나님께서 이미 삼손을 떠나셨고 그나마 자기에게 있던 그 능력까지 함께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은 사역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할 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삼손에게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비극입니다. 사역의 마인드를 잃어버린 사역자, 하나님을 떠난 사역자에게 아직도 큰 능력이 남아 있다면 그건 그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비극은 은사와 능력이 없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은사와 능력을 받고서도 사역자의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삼손도 지금까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나실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분별력을 잃어 버리고 세상을 즐기며, 사랑하며, 유혹에 무너지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삼손은 능력때문에 망했지만, 여러분은 능력때문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이 무너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가사의 기생에게 무너졌고, 다음으로 들릴라에게 무너졌습니다. 마침재 삼손은 사명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삼손은 한 순간에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0.1%..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0.1%를 버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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