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의 제단을 헐라 [삿 5]

 

드보라가 40년간 사사로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만 벌써 3번째다. 위기때만 여호와께 돌아왔다가 평안해지면 다시 악을 행하는 순환적인 악행의 형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악순환의 고리는 점차 고질병의 증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는 이번에는 사막 지역에서 활동하는 유목민인 미디안의 손에 이스라엘이 칠년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하십니다. 6:2 읽어 보겠습니다. 유목민들은 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히진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착된 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었기에 보통때는 광야나 사막에서 활동하다가 추수때가 되면 몰려와 곡식과 토지 소산을 약탈하는 기동성이 강한 약탈자들이었습니다. 6:3-4을 보세요.

 

마침내 이스라엘은 입에 풀칠한 양식조차 모자라는 궁핍을 경험하게 됩니다. 언뜻 보면 이런 이동성 적의 침공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기자는 그들의 폐해의 심각성을 지적하기 위해 매우 시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6:5 을 읽어 보세요.

성경기자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 미약함이 심하다고 한마디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6)

 

이들은 식생활뿐 아니라 주거 생활도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6:2 보세요. 여기서 구멍은 지하 창고용으로 바위 지역에 판 구덩이를 가리키며, 굴은 동굴로서 소돔 성이 멸망한 후에 롯이 두 딸과 거했던 것과 같은 굴을 의미합니다. 산성은 야영자나 도망자를 위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 요새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편안한 장소에서 거주하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안들 때문에 이들은 7년동안 땅굴 파는 두더지 같은 삶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최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초췌하고 초라한 모습의 삶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도적적, 정신적, 영적으로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눌려 살고 있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에 맞서 담대하게 싸우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산에다 굴이나 파고 동굴에 갇혀서 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들의 무리라고 자위하고 있지만 밖에서는 영적 빈민굴과 다름이 없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인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토지와 소산을 멸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상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메뚜기 같이 많은 적’이라는 비유법은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온 이야기에는 ‘부르짖음’이 두번이나 반복됩니다. 6:6-7을 보세요.

 

부르짖음에 대한 반복은 울부짖는 백성의 모습을 더욱 애처롭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들은 미약함이 심해 전보다 더욱 회개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에대한 ‘의존감정’이 높을 수록 은혜도 더합니다. 

 

이같은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는 역시 당신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6:8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구원자인 사사가 즉각 보내어지지 않았고 대신에 선지자가 보내졌습니다. 이것은 드보라 시대를 상기시킵니다. 그러면 이 남자 선지자가 드보라보다 더 큰일을 하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드보라를 능가하기는 커녕 이름도 없는 무명의 선지자였으며 그 임무 또한 드보라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커녕 신랄하게 비난한 것입니다. 

 

선지자의 비난은 간단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으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짜고짜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동안 이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지적합니다. 6:8-9을 보세요.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과 이방 세력의 종노릇에서 해방시킨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가나안 땅에 거하던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무엇때문에 이들에게 이 같은 특권을 베푸셨는가? 그저 무조거적인 편애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이 여호와만을 섬기며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도록 해 여호와의 이름을 드 높이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어서 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수단으로 당신의 이름이 만방에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교가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Missio Dei !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삶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6;10을 보세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사명을 팽개치고 가나안인들에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면서 가나안처럼 그저 삶을 행복하게 누리려는 자들로 변해간 것입니다. 이렇게 동화되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싫어하십니다.  12:2을 보십시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들이 거듭 부르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구원자를 보내기 않고 선지자를 보내 책망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가 잘 이루어지고 있냐 이말입니다. 

 

이런 시국에 하나님께서는 기도온을 사사로 부르십니다. 기드온은 5번째 사사요 므낫세 지파를 다스린 인도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는 칼 한자루 소유하지 않은 300명의 군대로 미디안인들을 몰아낸 전설적인 사사입니다. 그가 사사로 있던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을 누렸습니다. 그가 얼마나 탁월한 지도자였는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왕으로 다스려줄 것을 요청한데서도 엿볼수 있습니다. 그가 이토록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요? 

 

기도온이 태어나면서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타고난 것인가요? 아니면 뛰어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가요? 그러나 그를 소개하는 6:11-12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을 보세요.

 

우리가 만나는 기드온의 첫 모습은 무엇입니까?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밀을 타작마당에서 타작하지 않고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는 것입니까?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즉 미디안 사람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기도온이 밀을 타작하는 것을 알면 미디안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리가 없었습니다. 들판에서 나귀들이 끄는 짐마차가 동원되는 정상적인 타작방법은 사람들의 눈을 끌기 쉬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빼앗기기 마련이죠..따라서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을 몰래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온 ‘타작하다’의 동사는 적은 양의 곡식을 막대기로 때려 타작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미디안들이 눈치챌까봐 포도주 틀에서 적은 양의 밀을 타작하는 기도온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초라한 기도온이 전설적인 사사기 된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기도온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보내셨다는 강한 의식을 가진 후 부터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초라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하더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강한 소명감을 부여받는다면 우리의 삶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축복에도 불구하고, 기도온은 이것에 대해 불신을 보입니다. 오랜 박해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불신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을 보세요. 기드온은 당시의 상황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디안에 의해 7년동안 압제를 당해 먹을 양식머저 빼앗기고 산에 가서 굴 속 생활이나 하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기드온은 더 나아가 조상들이 늘 이야기하던 출애굽당시의 기적이 어디 있냐고 반문합니다. 13절을 보세요. 조상들은 여호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다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이야기 했지만 기도온은 이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실토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이런 경험과 고백을 많이 듣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내게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나요? 

 

과거에 하나님이 이적을 베푸셨다지만 현실에는 그런 기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기드온의 낭패감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조상들과 함께  하셨는지는 모르나 지금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드온은 여호와가 자신들을 버렸음이 틀림없다고 항변합니다. 우리도 종종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항변을 합니다. 000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와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 눈이 있으시면 내 처지좀 보세요 라고 항변하지 않습니까? 13절을 보세요. 

 

우리는 여기서 사사기 안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사들은 세움을 받을 때 주저함 없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주저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대간의 격차를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젊은 세대로서 조상들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이야기는 늘 들었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구원의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항변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우리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은 말로만 들어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예배의 자리로, 찬송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내 보내십시오. 그들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엄마가 아빠가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모태신앙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지식의 수준에서 머물게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하는데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다라는 것은 ‘야다’라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이는 경험해서 직접 안다는 표현입니다. 

 

예배, 찬송, 기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 입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에게서 기드온과 같은 모습이 보이시나요? 어머니, 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강요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왜 이리 가난하고 척박할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실패를 경험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교회의 모습이 과연 이렇까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악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많은 질문이 떠오를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드온처럼 이 같은 질문만 던지며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미쳤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이론적인 대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6:14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온에게 이론적으로 설명을 자세히 하시지 않고, 실제적으로 명하십니다.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가라고 명하십니다. 빌립도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자 빌립은 그와 앉아서 조근조근 이론적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와 보라’라고 합니다. ( 1:46)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다나엘에게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의 신앙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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