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시면 된다 (삿 10:1-5)
우리 말 성경은 ‘아비멜렉의 후에’로 시작하지만, 원문은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로 시작합니다. 누가 일어났습니까? 잇사갈 지파의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났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처럼 3대에 걸쳐 이름을 거론할 때는 중요한 인물임을 나타냅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자식도 이름이 “도도(his loved), 부아(splendid), 돌라(worm)” 모두 2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돌라라는 이름의 뜻은 ‘벌레’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과 대조적이다. 벌레는 ‘lowly person’이란 뜻이다. 사사기 뿐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돌라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그의 이름의 뜻이 벌레라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대부분 성경에는 이름과 그의 인생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돌라는 그의 보잘 것없는 그의 이름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 있게 쓰임받은 인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낮은 자를 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 아비멜렉,엘리멜렉을 보라. 이름처름 살았는가? 그리스도인? 당신은 어떤가? 신자답게 살고 있는가?
야베스란 사람도 그렇다.역대상 4: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1) 지역을 넗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2) 환난을 벗어나 내게 3)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기도를 할 때는 야베스처럼 구체적으로 하라.
본문에 돌라가 일어났다(쿰)는 말의 원문은 무언가 큰 결심을 하고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드보라가 여선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쓰였습니다. 삿 5:7을 보세요.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드보라가 일어났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결심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분과 환경에 상관없이 열정으로 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를 향한 거룩한 열정이다.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열정이 있는가? 헌신, 섬김의 열정말이다.
그런데 돌라는 어떤 결심을 했을까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는 말을 통해 그의 결심이 어떤 결심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아비멜렉의 후에”라는 말입니다. 아비멜렉 이후에 이스라엘은 구원이 필요한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구원입니까? 본문에 어떤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외부 침략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구원입니까? 바로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구원, 신앙적인 구원, 행정적인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이후에 돌라는 결심하고 일어나 이스라엘을 모든 혼탁함으로부터 질서가 잡힌 나라를 세우기 위해 헌신을 했다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의 업적-배반의 명수(9장), 신뢰, 인격이 없고, 아픔과 상처를 백성들에게 깊게 준 인물이다. 아마도 백성들은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23년동안 나라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에 왜 결심이 필요했을까요? 이런 일에는 아무도 뛰어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곡식을 거두는 일은 하려고 하지만,아무도 씨를 뿌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돌라가 열심히 씨를 뿌리니, 그 다음은 야일이 치리할 때도 이스라엘 나라에는 ‘살롬’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사가 지난 간 후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의 큰 틀 –배교압제탄원구원-을 반복했다. 그러나 돌라는 그 사이클을 반복하지 않는다.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가 행한 업적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교회에서도 보면 꼭 눈에 띄는 사람만이 일하는 것은 아니다. 숨어서 남 모르게 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 다 중요하다. 앞에서 끌어주는 사람,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 모두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역할이다.
돌라가 행했던 업적이 크게 4가지로 나타난다. 동사를 중심으로 표현되어 있다. 1) to arise to save Israel 2) ruled and governed 3) died 4) buried 안정된 통치를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사사로 일어날 때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 했는가?바로 ‘혼돈, chaos’였다. 그러나 그가 마칠 때는 ‘살롬,질서’였다. 이것이 바로 영향력이다. 얼마나 안정적인 업적인가? 우리 교회도 이런 일군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개척교회 초기는 ‘혼돈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우리 교회가 한 해 한 해 안정적으로 세워져 가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벌레와 같은 돌라가 쓰임받은 사역의 내용이다. 한 마디로, 그는 살다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살았겠는가? 믿음으로 최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살롬을 누가 허락하는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통치하는 23년간 살롬을 은혜로 허락해 주신 것이다. 교회로 말하면 부흥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역사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돌라와 같은 신분이라고 주눅들지 마세요. 돌라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주눅들지 마세요. 돌라와 같이 여러모양으로 내세울 것 없어도 주눅들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삼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은 싫어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또 마음은 그것이 아닌데 행동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내 마음인데도 내가 모릅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고백해 보세요. 내가 나를 잘 압니까? 그러니 마음을 보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히 4:1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도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어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돌라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 형편, 외모가 보잘 것 없어도 당신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게 하시고 한 평생 살롬의 시대를 살다가 역사에 남게 하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 가는 것이 가장 잘 죽은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 헌신도 그렇다. 씨뿌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개미 100마리 이야기 개미 30마리 이야기 5마리가 일하더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 인것 같다.
내가 씨를 뿌려서 내가 거둘 수 만 있다면 누구나 나서서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뿌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다른 사람이 거두게 된다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는 뿌리는 사람도 필요하고, 거두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기쁨을 누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이런 사역의 본을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의 사명은 그가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그 길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일관된 고백은 이것이었습니다.
요 3:29-30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오직 모든 영광을 그가 얻을 수 있도록 나는 죽도록 씨를 뿌리는 일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죽도록 씨를 뿌린 인생을 향해 주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눅7:28) 세상에서는 죽도록 씨만 뿌리다가 끝난 인생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인생을 살아간 사람보다 큰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 사람의 평가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학연,지연,혈연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을 가지고 그의 인생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름, 어떤 배경, 어떤 상황이든지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있으면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들러리의 기쁨’을 아시나요? [예들기] 모세/아론, 여호수아/갈렙, 다윗/요나단, 바울/바나바가 있었다.
몰론 이런 인생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의 돌라처럼 큰 결심을 하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어나는 진정한 믿음의 삶에는 큰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릴 각오를 하고 오늘 사역 현장에서 한 알의 씨앗을 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내 영광과 내 야먕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큰 자로 인정하시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상급으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의 영광을 위해 일어서려는 큰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이 바로 이처럼 결단하고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일어날 것입니다.
[야일의 행적]
그는 아들을 삼십 명이나 두었습니다. 한 여성이 아들 삼십 명을 생산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후처난 첩을 많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첩을 두어서 패가망신한 사건을 생각한다면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은 어린 나귀 삼십을 탔다고 기록합니다. 나귀를 탄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는 귀족들이나 왕이 누릴 수 있는 권세였습니다. 다윗의 아들들도 각기 나귀를 타고 있었고 (삼화 13:29),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의 나귀에 탔으며 (왕상 1:38), 나중에 스가랴 선지자는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도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슥 9:9)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성읍까지 두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성들은 길르랏 땅에 있었는데 이름을 ‘하봇야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야일의 촌락, 야일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관심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그와 그의 아들들의 정치적인 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일 ‘ryaiy"’, 나귀 ‘ryI[;’, 성읍 ‘ry[i’ 라는 뜻으로 풍자적으로 야일의 행적과 그의 관심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기드온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은가? [기도온행적]
칼막스=공산주의를 주장했다. 공산주의 이론으로 하면 자본주의를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이 돈을 싫어합니까? 좋아합니까? 김정일을 보세요. 개인을 위한 궁정이 17개, 승용차가 수백 대, 코냑 구입에 연간 7억 2천만원을 쓰고 있으며,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기쁨조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야일의 아들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평안한 시대에 자기들의 부와 권력을 증대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 능력이 없는 무능한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나설 용사를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습니다.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비메렉의 후에’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두웠던 아비멜렉의 시대가 끝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5년동안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다는 말도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쟁을 치렀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자기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돌라의 시대가 끝난 뒤에 야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나라가 안정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돌라가 큰 결심ㅇ르 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짧은 말씀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에 힘썼던 진정한 일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일의 시대가 끝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에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리더가 잘못서면 이렇게 공동체는 쉽게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순장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우는 리더 되십시다.
돌라와 야일의 삶을 대조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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