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 방해이던가 ( 12:6-15)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가를 보면 온통 삶의 질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지 삶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내용은 단지 삶의 질이 충족된 사람들, 즉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큰 부담이 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끔 생각해 볼 문제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우리는 삶의 질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도 배부를 때 찾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무슨 하나님이냐'는 푸념을 하기도 합니다. 배가 불러야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볼 마음을 여유를 가지는 것이지 배가 고픈데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 편해야 하나님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이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자들이 누리는 취미생활 정도로 여긴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종교에 대한 시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에 좋은 환경이란 없다고 봅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신자가 날마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데, 과연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있는 환경이 있을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원하는 환경이란 교회를 편하게 다닐  있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기에 편한 여건 속에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것을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지킨다는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것은 교회를다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에 걱정만 없으면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드니까 기도도 안되고 성경 보는 것도 안되고 봉사도 못한다는 푸념들을 많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환경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이라는 것이 누구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환경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어떤 환경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환경과 삶의 질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과 삶의 질이라고 해도 믿음은 불변입니다. 즉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배고픈 대로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배부르면 배부른 대로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신자의 삶의 내용이 삶의 질 때문에 사라져 버리고 희미해진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증거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황이나 여건은 신앙의 문제에 전혀 영향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신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기 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중심으로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 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다면 모든것은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신앙을 지킬  있는 환경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몸도 위하고 신앙도 지켜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사람은 배부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배부름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 살아도 잠자는 것은 같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몸은 같은 몸입니다. 옷이 사람의 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질이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따라가며 주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도록 부추기는 것이  사단입니다.

환경을 말한다면 에덴 동산만큼 좋은 환경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사단의 지배 아래 있고, 신앙을 지킬만한 좋은 환경이란 결코 없다는 것은세상은 구원받기에 좋은 환경이 절대 아니란 말과 동일합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없는 그런 환경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외부에서 은혜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이란 오직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위해서 믿는 , 그것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정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내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된 지혜이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 임한 자로서 맨처음 보여지는 것이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쁜 환경에서도 불구하고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이라고  수도 없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열심히 교회 나오는 것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랑으로 삼는 것을 많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도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 그것이 신앙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바람에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다. 주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을 것은 신앙고백  때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죽음을 만류한 것은 사단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없이, 십자가에 자기 죽음이 없이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서 주님을 믿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고통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내는 것만큼 고통입니다.  고통이 없이 주님을 따르도록하는 것이 사단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류한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만약  방법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형편대로 따라가고, 내가 가고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누가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혀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이고 우리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는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양보와 타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 적당히 교회 일을 하고, 교회가 하는 좋은 일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문을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본문은 입다 이후에 일어났던 사사들의 이름이 몇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에서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입다가 죽은 후에 입산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입산이 죽고 11절에 엘론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하고 엘론이 죽은 후 압돈이란 사람이 사사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무엇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면서 입다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사들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목사가 태평성대라고 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할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증거하기에 힘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목사가 아닙니까? 그 일이 태평성대라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사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로 세움을 입는 것인데 태평성대이기 때문에 사사가 되었다가 죽었다는 것만 남긴다면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없이 단지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삶에 담길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8-9
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베들레헴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었더니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보내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고 말합니다. 입산에게는 아들이 30명이고 딸이 30명이라는 것을 보면 입산의 부인이 여럿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산은 아들을 위해서 타국에서 여자 30명을 데려왔고 딸은 타국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합니다.

 

타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타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이 이방인과 교류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른 가문, 즉 다른 지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어쨌든 입산이 자신의 자식을 모두 타국의 사람과 결혼을 시켰다는 것은 오늘날 자식을 무조건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부모의 허영심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내 나라에서는 만족을 못하기 때문에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 그만큼 가치가 높아진다는 생각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그의 뒤에는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이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어린 나귀 칠십 필을 탔었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고 말합니다. 10:4절에 보면 야일이란 사사에게도 아들 삼십이 있어서 나귀 삼십을 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도 말씀을 드렸지만 나귀를 탔다는 것은 부요함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압돈에게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어서 나귀 칠십 필을 탔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요함을 누렸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사사로서의 삶이 단지 사사가 되었고 죽었다는 것, 아들을 위해서 외국에서 여자를 데려오고 딸을 외국으로 시집보냈다는 것, 아들과 손자가 나귀를 탔다는 것, 이러한 기록만 있는 사사라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사사로서 살았지만 사사로서의 삶의 내용은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서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장로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을 그릇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담겨지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담겨지고 있습니까? 신자는 단지 살아가는 문제보다는 삶의 내용이 중요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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