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택하라 (삿 3:1-6)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며 우리를 은혜로 당신 자녀 만드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해, 내 소원과 문제를 해결해 주고 성취해 주는 그런 힘으로서의 신을 찾는 정도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찾는 신은 자신들이 조작한 ‘나’라는 신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까지 살펴 본 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우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찾아 가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 40년을 지키시며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를 한순간에 무너뜨리신 후 가나안에 정착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다니요.
인간은 그 어떤 기적이나 신비를 체험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만의 신을 조작해 냅니다. ‘나’라는 존재의 주체를 살찌우고 강화하여 세상의 지배구조 속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원하는 신을 조작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이 원하는 신은 ‘나’의 삶에 주체로 개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여야 하고 내가 조작해 낸 신은 그 주체인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조작된 신은 늘 달램의 대상이 됩니다. 먹을 것으로 달래고, 지성으로 달래고, 제물로 달래주면 됩니다. 그러면 각자가 가진 특기를 발휘하여 인간을 돕는 방식으로 인간과 신의 관계가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풍요와 다산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살찌우는 것을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로 설정하고 살아갑니다.
이 시대의 사고 중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중에 하나가 진화론입니다. 자연 자체에서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발전하고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화론이 핵심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철저하게 신의 존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신론 역시도 그렇습니다. 신은 창조에만 관여를 했고 나머지는 자연의 법칙에 맡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신론 하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아주 가치있고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사사 시대에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인간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아숭배 사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들이 초월과 초월의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실 속의 ‘나’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런 역사를 통해 인간들의 마음 속에 숨기고 있는 자기 우상 숭배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3장부터는 드디어 사사기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속을 썩이는 그런 존재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유심히 살펴 볼 것은 그런 상황을 누가 연출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삿 3:1 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נסה]하려 가나안 열굴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이 무슨 시험입니까? 그 시험이 어떤 시험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시험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야 합니다. 시험하다는 단어는 ‘נסה’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검증하고 드러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보다, 시도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을 직접 알아 보시고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창 22장으로 가보시죠.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아브라함의 보물 이삭을 버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기 보시면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데 그 이삭을 그냥 이삭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네가 네 것으로 있는 것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험의 내용은 ‘하나님이냐?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의 시험인 것입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중을 들추어내시는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 자체가, 피조물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험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주어졌던 시험이 아닙니다. 그 시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악과 시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최조의 인간인 아담에게 하나님의 법을 내려 주십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아라’ 하나님의 법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을 지킨다는 것은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법을 어겼습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의 말씀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였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의 유익으로 마음이 기울 때 그것을 ‘죄’라고 하고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타’ 즉 ‘방향이 틀어졌다’, ‘하마르티아’ 즉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신명기 8장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고 나오시고 이스라엘에게 똑같은 시험을 던지십니다. 신 8:1-3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십니다. ‘너는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그리고 연이어 2절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인지 아니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인지를 판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다고 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신명기 13장으로 가면 하나님 נסה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 여러 모양으로 떨어지고 있음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 13:1-3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적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נסה]하심이니라”
이적과 기사는 ‘나의 관심’과 ‘나의 욕구 충족’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절대로 그러한 자들의 미혹에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5절을 보면,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1]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2]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자,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시험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 가나안 열국들을 이스라엘 주변에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5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러므로’,,,,가나안에 들어가면 다 쫓아내고 죽여 버리라고 했던 가나안 족속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깁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 밝혀내려는 내용과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그럴사 해 보이지만,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겨두신 가나안 족속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의 죄인들인지를 드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험은 ‘너희는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를 밝혀내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래야 메시야의 필연성이 증명되잖아요?
창 6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각 세대가 언약 백성이 아닌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언약을 손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시한 것입니다. 창 26장의 에서의 그런 죄를 범합니다. 창 26: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논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니라”
창 6장에서의 결혼의 결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표현을 쓰시나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축복하는 그 결혼의 모습을 보시고 한탄을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이 용사가 되고 싶어 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는 큰 자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결과를 보시고 한탄을 하십니다. 그러고는 그런 자들을 싹 쓸어버리시겠다고 저주를 선포해 버리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고 되고, 큰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유용한 자가 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은 바로 이런 사건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이기 때문에 악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 11장의 바벨탑의 사건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열국의 여자들을 아내로 삼아 그들과 혼인을 했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익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쓰레기가 됩니다. 다 쫓아내고 죽이라고 하셨거든요. 아담과 하와가 했던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 처럼 되어’
잘 보십시오.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바알과 아세라라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바알과 아세라는 ‘나’라는 우상의 모형일 뿐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말씀을 버리고 나니 내 말을 들어 줄 다른 우상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말씀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상은 듣는 존재이지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자기 발전을 꾀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환경과 조건과 재화를 이용하려는 것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런 구조속에서는 인간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말씀을 내리시고 그 말씀을 성취해 나가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여야지 자기의 말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자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히려 말하는 자는 ‘나’만 남고 나에게 말하는 그 대상이 잊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스라엘의 현주소입니다.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죠. 6-7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지라”
그렇게 인간이 애굽의 종 되었던 자신의 실체를 잊어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미래의 되고 싶은 나’를 추고하게 될 때우리의 하나님은 우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까지도 우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말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했던 말입니다. ‘하나님 처럼 되라’
하나님만 말씀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나도 하나님께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그 자리에 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 4장에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그 요구를 듣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떡을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떡, 우리 인간을 진짜로 행복하게 해주고 살려주는 떡은 하나님만이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위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마귀의 그런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들었던 신명기 8:3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우리는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존재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딸도 주고, 신앙 정도도 주고…다 주네요…오늘 사사기 3장은 그런 이스라엘의 영적 현 주소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는 위치이십니까? 말하는 존재이십니까? 순종이십까? 불순종이십니까?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를 택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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